2023년 8월 28일 월요일

중국 고대에는 제사.종교에서, 최고 제사장이던 天子가, 고대 한국에서 보듯이(신라 남해왕이 무당), 神과 소통하는 巫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주시대의 관직에서 보듯이, 종교.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는 6卿의 신분중 하나였습니다.

중국 고대에는 제사.종교에서, 최고 제사장이던 天子가, 고대 한국에서 보듯이(신라 남해왕이 무당), 神과 소통하는 巫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주시대의 관직에서 보듯이, 종교.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는 6卿의 신분중 하나였습니다. [1]. 공자님의 어머니 관련, 시중의 정형화되지 않은 각종 루머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중국 고대에는 제사.종교에서, 최고 제사장이던 天子가, 고대 한국에서 보듯이(신라 남해왕이 무당), 神과 소통하는 巫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주시대의 관직에서 보듯이, 종교.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는 6卿의 신분중 하나였습니다. 공자님의 어머니가 巫역할을 하였다고, 시중에서 자주 거론하는데, 정사로 보면 확인은 어렵습니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巫의 역할을 하였다면, 그 가족들이 멸망한 왕조의 제사에 영향을 받는 왕족이었거나, 6卿의 신분중 하나였던 종교.제사담당 관리의 후손으로, 신분높던 조상의 후예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 고대 한국의 임금(君)성격의 巫와, 조선시대의 억압받던 강신巫는 다릅니다. 삼국사기에서 보듯이, 신라시대 남해 차차웅이 방언으로 무당의 제사기능을 가진 임금이었고,한국민족문화 대백과로 보면, 한국 고대의 무당은 "고대부족국가 때부터 무는 곧 ‘군(君)’인 동시에 신과의 교섭자로서의 위치에 있었고, 그 활동은 초인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삼한시대나 삼국시대는, 왕이 제천의식이나 여러 제사를 주관하는 君자격 무당성격이 그대로 세습되는 형태였는데, 고려시까지는 제천의식을 통하여, 고대의 임금(君)이 행하던 제천의식을 행하면서, 君자격 무당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임금(君).무당의 제사의식인 제천의식말고, 산천제사등에서 신령과 통하는 일반인들의 강신무(巫)가 형성되었다고 보여지는데, 임금(君)의 자격인 제천의식을 건드리지 않았기에, 신분이 높던 세습무(세습巫:사실상 왕이 제천의식에 대한 세습무(巫)라고 할 수 있음) 말고 강신무(巫) 출신 무당에 대한 탄압은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고려말 원나라 지배시기에 중국 국자감과 같은 명칭을 못 쓰게 하여, 국자감은 고려시대에 성균관으로 개칭했고, 조선 성균관,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려말.조선시대에 들어, 중국을 천자(天子)국으로 확실히 존중하면서, 한국 고대 임금(君).무당의 영역이던 제천의식이 폐지되고, 임금은 사직제사, 종묘제사, 석전(공자님제사)만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중국 천자(天子)가 거행해오던 제천의식을, 기자조선의 후손 삼한시대(상달제등)부터 자연스럽게 행해오던 한국에서, 조선의 임금이 제천의식을 거행하지 못하니까, 제후의 영역인 사직제사, 종묘제사, 석전(공자님제사임.중국 天子는 제천의식부터, 地神제사성격의 사직제사, 조상제사 성격의 종묘제사, 先聖이신 공자님에 대한 석전 모두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음)만 행해야 하는 위치로 제사권한이 축소되었습니다. 그런데, 임금.君의 후손출신 세습무가 없어지고, 새로운 강신巫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 산천의 신령들에게 제사를 하니까, 제후의 제사권한인 地神제사(사직제사), 조상제사(종묘제사), 석전(공자님제사), 山川제사 권한을 가지고 있던, 조선의 왕이, 강신巫출신 무당들의 산신령제사등을 무의미하게 하기 위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강신巫들의 신분을 격하시킨것이 해당됩니다. [2].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유교에서는 하느님(天)을 초월적 절대자로 보고 숭배해왔습니다. 공자님은 하늘이 내려보내신 성인. 성인임금(文宣王:공자님 이전의 요순우탕과 같은 성인임금이심)이시자, 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이 점이 중요합니다. 공자님의 가장 큰 업적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은주시대에 믿어온 우주만물의 지배자이시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의 초월적 존재를 많은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계승시키시고 가르치신 점입니다.孔子聖蹟圖에 보면 균천강성(鈞天降聖)의 그림이 있습니다. 공자가 탄생할 때 모친인 안징재(安徵在)의 방에서 균천의 풍류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하늘이 성자가 탄생함에 감동하여 화락한 음악으로서 위로하였다는 이야기를 도해한 것입니다. 균천(鈞天)이란 하늘의 중앙인데, 최고신이신 하느님(天)이 직접 내려보내신 성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天)의 하위신이신 오제(五帝:조상신 위치에서 승천하시어 계절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하위신이 되신 또다른 하느님의 모습)께서 내려보내신 후손개념이라기 보다는 왕조가 바뀌어도 영원토록 인류에게 숭배되어야 할 성자의 탄생에 감동하신 균천(鈞天)께서 음악으로 위로하신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세에서 공자님의 형편이 가난했다느니, 가난해서 천한일도 하셨다느니, 나이많은 아버지와 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논란의 대상이 된다느니 하는 속물적인 시비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이 모든것을 초월하실 수 있는 최고 하느님(鈞天:五帝의 여러 하느님중에서도 중앙에 계시고 존경받으시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셨기 때문에, 후대의 황제.제후.사대부.만백성이 숭배하고 존경하는 성인이시자 스승으로 추존되신 것입니다. 균천(鈞天)이란 하늘의 중앙인데,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신과는 다르게, 오제(五帝)중 가운데에 위치하시는 황제(黃帝)로, 오제중의 으뜸 하느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황제(黃帝)는 성인(聖人 , 聖天子)으로 사시다가, 승천하셔서, 계절을 다스리시는 오제(五帝)하느님중 한분으로, 오제(五帝)하느님중 가장 중요한 하느님이십니다. 은나라 왕족 후손이신, 공자님의 조상이십니다. ​ **공자님은 원래부터 왕이 아니시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성자로 탄생하시고, 하느님(天)의 기품을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가르치시며 인의예지신, 삼강오륜의 덕목을 있게 하신 성인으로 사시다가 사후에 성인임금.성인스승(大成至聖文宣王.至聖先師)의 공식 칭호를 추존받으신 분이십니다. 공자님은 하느님(鈞天)에게 덕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은나라왕족의 후손이시나 가난하여, 大夫의 자손으로 낮은 직책에서 시작하여, 만인의 스승이 되는 과정을 겪으신 위대한 성인이시자 스승 공자님. 제왕과 만백성의 스승 공자님! 공자님의 아버지가 그 당시 너무 나이가 많아 음양오행론에 비추어 볼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지난것으로도 생각되어 생물학적인 야합으로도 서술된 기록도 있으나 성인임금이시자 위대한 스승이라는 존경을 더 중요시하며 객관적으로 기록. 인류는 남자가 경제력이나 능력이 있으면, 어린여자를 얻어 종족을 보존하려는 하느님이 부여하신 신성한 마음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될게 전혀 없습니다. 공자님 어머니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 같은 士계급끼리의 결혼. 딸만 낳은 아버지가 정상적인 남자로 대를 잇기 위해 늦은 나이에 배필로 얻은 공자님 어머니. 그 당시 중국은 왕이나 士大夫계층이 일부 다처제로 대를 잇는게 아주 자연스러운 사회였습니다.하느님, 성인이나 역사적 인물의 경우, 타국의 침략을 받아 지배자가 바뀔경우 격하되는 경우가 많은데, 세계사와 국사, 유교경전, 가톨릭경전, 국내법.국제법, 그리고 정사(正史)로 판단해야 합니다. 혹시 루머로 대중언론에서 힘을 얻은 세력들이 하느님.성인(聖人:聖天子이신 요.순.우.탕.문.무같은 성인임금들 및 나중에 문선왕으로 추증되신 성인임금 공자님)들에 대해 오도할까봐 걱정되어서 덧붙입니다. 공자님이 사시던 춘추전국시대에 무당이라면 은나라시대 최고제사장인 왕(최고 무당)의 제사가 일반에게도 널리 퍼져, 왕족.사대부계층의 집에서 제사를 치르게 되어, 전부 이전왕조 최고 무당같이 제사신분이 높아져서 그걸보고 억측하여 야담을 만들수 있겠습니다. 요순우탕문무주공 및 공자님, 기자조선시대의 왕, 삼한의 왕, 부여 금와왕, 고구려 (고)주몽왕, 신라 (박)혁거세, 신라 남해왕같은 고대의 최고 제사장(최고 무당이자 왕)과 관련되어, 나중의 개념으로 왜곡도 가능하겠다고 우려해봅니다. ** 2천년동안 아무 문제 없다가, 한국을 어버이나라로 섬기며 살던, 수천년 야만족, 일본 불교 Monkey의 강점기 잔재들이, 주권이나 근본없이, 시중의 야사나 루머에, 공자님어머니를 물고 늘어지며, 이런 소문들을 유포시키며, 도발하더군요. 잘 모르니까, 그리고 일본기준으로 덤벼야 하니까, 루머.야사에 의존해 마음껏 유포해 놓았습니다. 공자님 아버지는 은나라왕족의 후손으로,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후, 공자님의 조상에게, 천자의 신분으로 치르던 제사중, 주나라를 무너뜨릴 염려가 없는 제사는, 그대로 유지토록 해주었습니다. 공자님 아버지는, 주나라시대에, 士보다 높은 大夫신분으로, 동료 무사의 딸 안징재를 통하여, 공자님을 낳으셨습니다. 공자님 어머니 신분도, 역시 무사신분 大夫의 딸이었습니다. 첫번째 부인은 아니고, 그당시 왕족.귀족들의 관행으로, 일부다처제의 풍속에서, 아들을 얻기위해, 맞아들인, 부인입니다. 고대의 왕비들은, 正妃가 아닌경우, 次妃라 하였고, 귀족계급의 정처가 아닌경우, 次妻라하여, 일부다처제로 살았습니다. 귀족이하 계층은, 대부분 일부다처제로 살 지위나 형편이 않되었습니다. 왕족.귀족계급이, 공식 혼인을 치르지 않은경우, 김유신 장군 어머니 만명부인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를 야합으로도 표현합니다. @김유신(金庾信)의 어머니이다. 할아버지는 갈문왕 입종(立宗)이며 아버지는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이고, 남편은 가야왕족의 후예인 김서현(金舒玄)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의 아버지인 서현(舒玄)이 길에서 만명부인을 보고 마음으로 기뼈하여 중매도 없이 야합(野合)하였다고 한다. *출처:만명부인 [ 萬明夫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공자님께서 술회하시듯이, 청년시절 공자님은, 창고지기같은 낮은 벼슬도 하시고, 빈천(가난하고 직위가 낮음)하신 초반기 인생을 경험하셨습니다. 주나라에서 士보다 높은 大夫로 사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때는 정말 가난하게 사신것 같습니다. @중국 고대에는 제사.종교에서, 최고 제사장이던 天子가, 고대 한국에서 보듯이(신라 남해왕이 무당), 神과 소통하는 巫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주시대의 관직에서 보듯이, 종교.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는 6卿의 신분중 하나였습니다. 공자님의 어머니가 巫역할을 하였다고, 시중에서 자주 거론하는데, 정사로 보면 확인은 어렵습니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巫의 역할을 을 하였다면, 그 가족들이 멸망한 왕조의 제사에 영향을 받는 왕족이었거나, 6卿의 신분중 하나였던 종교.제사담당 관리의 후손으로, 신분높던 조상의 후예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 고대 한국의 임금(君)성격의 巫와, 조선시대의 억압받던 강신巫는 다릅니다. @혈통으로보면 하느님을 숭상하는 공자님은 은나라 왕족의 후손. 목수일도 하셨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게 기독교 교리니까, 양아버지의 혈통은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왕의 후손. 부처는 현재의 네팔지역 태생으로 그 당시 최고 신분인 제사를 주관하는 브라만 다음의 정치.군사계급의 크샤트리아 출신. 은나라나 주나라 시대는 왕이나 왕족이 최고 제사장으로 제사의 주관자였으며, 제정일치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고대 인도는 제정이 분리되어 제사를 담당하는 브라만이, 정치.군사를 담당하는 크샤트리아보다 더 높았습니다. 그래서 최고 계급 브라만에 항거하여 그 다음 신분인 크샤트리아 출신 부처가, 브라만교에 항거해 일어난 것입니다. @고대 한국의 경우, 부여 금와왕, 고구려 주몽임금, 신라 혁거세임금등은, 하늘의 신령함으로 태어난 유교의 상고시대 天子개념에 영향받은 탄생신화를 가졌습니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하느님족 유교나, 가톨릭의 하느님 숭배 전통! 이 자격이 가장 중요합니다.@공자님께서 태어나실때 은나라왕족의 후손이라, 그런지, 하늘에서 하늘의 사자들이 내려와 축하해주었음. 예수님은 다윗왕의 후손. 석가는 그 당시 인도의 최고신분 브라만(성직자계급)이 아닌, 정치계급의 크샤트리아 출신. 공자님은 나중에 성인임금(문선왕, 문선제)칭호 추증. 예수님은 기독교 세계 만왕의왕.@부처 Monkey는, 후세에 임금으로 추종되지 않았음.@조선시대 강신巫가 탄압받은건,제후인 조선국왕의 산천제사 영역을 침해하게 되어, 시중에서, 산신령에게 제사하였기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원래 중국에서 천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모든 제사를 다 치를수 있었고, 제후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지 못하는대신, 산천제사부터, 조상제사까지 치를수 있었고, 大夫와 士는 신분에 맞게 묘를 세우는 조상제사, 庶人은, 廟를 못세우고, 寢에 제사하도록 하였는데, 한국 고대부터 고려때까지는, 임금이 제천의식을 행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고대의 제천의식을 치르는 왕은 巫의 형태.그런데, 원나라시대, 중국 천자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고려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바꾸게하고, 조선시대에도 성균관으로 사용함. 조선은 명나라를 확실한 천자국으로 받들면서, 제천의식을 포기하고, 산천제사, 사직제사, 종묘제사, 공자님제사권한만 가지게 됨.@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 수천년전에는 공자님이나 예수님같은 하늘이 내린 성인(聖仁).하느님의 독생자 및, 한국의 고구려 (고)주몽임금, 신라 (박)혁거세같은 건국시조들은 하느님기준으로 보아야합니다. 초월적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만든 성인.건국시조들입니다. 한국의 조상중 시조로 받들어지는 분들도 이런 개념으로 시조가 되신분들 많습니다. 후세 피조물인 현대인 기준으로 보니까 정식 혼인을 거치지 않아, 야합.혼외자라고 역사개념없이 판단하면 않됩니다. 중국은 왕족.사대부의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이었습니다. 서자차별도 한국과는 다릅니다. 황제나 왕의 자손은 서자라고 않습니다. 한국도 고려시대는 별로 없다가 조선시대 초기이후 사대부들의 서자에 대해 양인첩과 천인첩을 구분하여 벼슬을 제한하다가, 갑오개혁때 서얼차별이 철폐되고, 해방이후에는 더더욱 법으로 없습니다. 성인이나 건국시조들은 하느님기준으로 보아야지 인간의 기준으로 후세에 재단하기 어렵습니다.유교문화로 한자쓰는 한국인들은 건국시조 아니라도 그 시조들이 출생이 묘한 초월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후대 시조들은 그대신 하느님의 개입이란 신성성이 없습니다. 공자님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초월적 聖人이십니다. 그 고대시대는 그렇게 하느님의 선택받은 소수의 성인.건국시조가 성인이 되고 왕으로 인정되던 시대입니다. 그 이후는 하느님 개입이 이루어진 성인.건국시조들이 거의 없습니다. ​ 그리고 중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서자차별이 없었습니다. 한국과는 개념이 달라왔습니다. 왕의 경우 그 자손은 누구나 왕족이었는데, 양반의 경우 고려시대와 달리 서자가 적자보다 상당히 차별을 받는게 조선시대 초기이후의 풍속이었습니다. 한국도 갑오개혁이후로는 서자차별이 없어졌고, 해방이후에는 더더욱 법률적으로 서자차별이 없습니다. 중국은 상고시대부터 지배계층(왕족.士大夫 계층)이 일부다처제로 대를 잇는게 보편화되었고, 한국도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처럼, 조선시대를 보면 왕족.양반계층이 일부다처제를 널리 수용하였는데, 일부 다처제는 구대륙인 아시아의 지배계급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구 대륙인 유럽의 경우 일부다처제보다는 일부일처제가 특징으로 이때문에 이혼이 발생하였던 것 같습니다. 유교문화권은 이혼이라기보다는 여자쪽에 흠결이 있을경우, 여자가 소박을 맞았습니다. 모두 현대이전 인류 전통으로 여권이 약해서 그러했는데, 이는 인류특성상 그대로 역사로 이어지고, 현대기준으로 비판해도 정사(正史)를 바꿀수는 없습니다. 유교문화권은 지배층의 경우, 士大夫가 두번째, 세번째 부인을 얻을때, 혼례를 치르지 않고 사실혼의 상태로 살던게 한국의 일반적풍습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서자차별이 없던 중국의 경우에, 지배층(사대부)이 혼례를 치르지 않아서 문제될건 없었습니다. 문화인류학적 차원에서 본다면 전문학자의 표본조사에서 인류의 70%가 일부다처제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일부다처제 복혼제의 한 형태로서의 일부다처제(polygyny)는 머독의 조사에 의하면 그의 표본 중 약 70% 이상의 사회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 출처: 일부다처제 (문화인류학, 2011. 9. 15., 한상복, 이문웅, 김광억) 구 대륙인 아시아.아프리카의 경우 유교와 이슬람.고대 기독교의 성경에서 지배계급의 일부다처제가 흔하게 보입니다. [3]. 왕족.귀족의 일부다처제 고대 중국 사회에서 聖人(聖天子)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공자님. 나중에 성인임금 문선왕으로 추증되시기 이전에는, 단지 선생님 칭호의 子(孔子) 칭호로만 불리시며, 聖人(聖天子)의 후손으로만 인식되셨습니다. 공자님은 성인임금(聖天子)이신 황제(黃帝. 皇帝가 아님)의 후손 중, 은나라 왕족출신의 혈통을 가지셨습니다. 聖人의 후손이란 역사적 서술은 聖天子의 후손이란 의미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때 고생을 많이 하시고, 혈통에 맞지 않게 여러가지 천한 일도 하셔야 했던것입니다.나이가 많아서 공자님을 낳으신 아버지는 성천자(聖天子)이신 황제까지 조상이 거슬러 올라가는 은나라 천자(天子)의 후손이십니다. 은나라 멸망후 주나라의 귀족계급인 대부(大夫:士보다 높음)로 사시다가, 같은 귀족계급 무사의 어린 딸을 통해, 정식 혼인을 통한 정처(正妻)가 아닌 차처(次悽)의 형식으로 결혼하여, 공자님을 낳으신 것입니다. 정식 혼인을 통하지 않아 그 당시 용어로 야합이라고도 서술하는 역사서가 있는데, 그 당시 중국은 왕족.귀족이 일부다처제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은나라 왕족 후손으로, 학문을 익힐 기회를 어머니나,주변 친척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으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학문할 기회는 주나라 천자의 자손들이 다니는 벽옹밖에 없었고, 귀족이라 해도, 따로 정규 학교교육기관이 없었습니다.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아버지가 아들을 낳지 못해, 제대로 된 아들을 얻기위해, 그당시 왕족.사대부가문의 관행대로 일부다처제 풍습에 의해 동료무사의 딸과 결혼식을 거치지 않고, 혼인관계를 형성하여, 공자님을 낳았는데, 그 본부인이, 나중에 공자님의 어머니와, 장애인인 공자님의 형, 공자님을 내쫒아서, 경제적으로 젊은시절 궁핍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공자님의 행적도 경전이나 정사 아니면 정확히 단정할수 없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사나 경전 아니면, 고대 성인들의 행적은, 시중에서 어떤 가설이 있어도, 인정되지도 않으며, 교과서에서 그런걸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것입니다. 현대에 들어, 자기주장을 하기위해, 하느님.신명을 숭배하지도 않는, 그런 부류의 침팬치과 부류에 영합하기 위해, 고대의 성인군자(天子나 하늘이 내리신 성인이시며, 후대에 성인임금으로 추증되신 공자님)를, 야사나 루머의 힘을 빌어, 정확하지도 않은 사실로 매도하는것은 좋지 않습니다. 고대의 성인들은, 현대기준으로 아무리, 그럴듯하게 재단해도, 하느님의 존재를 가르치신 성인분들은,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초월적 보호를 받게 됩니다. 침팬치과의 부처(최고 성직자 계급 브라만 다음의 네팔지역 군사.정치 담당 크샤트리아 출신)처럼 창조신보다 높다고 가르친 부류의 사람들은, 보통 하느님의 초월성은 무시하고, 공자님이나 예수님을 仁이나 恕, 사랑 및 예의범절때문에 성인이 되신걸로 착각하는데. 하느님의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거나 숭배하지 못하면, 합리적 의심을 하는 현대의 신종 Monkey로 분류되는 특성이 유교나 가톨릭등에는 있습니다.어원상으로 보면 개신교도 가톨릭(구교도)에 항거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거자)입니다. [4].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로, 6백년 넘는 역사를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는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Royal 성균관대. 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두 대학만 일류.명문대임. 해방후 조선성명 복구령으로, 유교국가 조선의 한문성명.본관등록이 의무인, 행정법.관습법상 유교나라 한국. 5,000만 한국인뒤 주권없는 패전국 불교 Monkey 일본의 성씨없는 점쇠 僧(일본에서는 천황). 그뒤 한국에 주권.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점쇠가 세운 마당쇠 僧대학). 그 뒤 서울대에 대중언론에서 눌려온 새로생긴 일제강점기 초급대 출신대나 기타의 비신분제 대학들.@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그러나 세계사로 보면, 가톨릭이라는 세계종교는 너무 세계인에 일반화되어서, 국사적개념과 병립하여, 세계사적 개념으로,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인 한국에서, 국제관습법상 세계종교 가톨릭의 자격으로 예우하는게 적절함. 일본식 개념으로, 일본 국지신앙인 일본 신도(일본의 국교), 불교, 기독교의 위상을, 한국에 적용할수는 없음. 그리고 한국과 바티칸시티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기 때문에, 한국헌법 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하고,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인 일본의 종교기준을 적용하는게 맞지않음. 불교는 인도에서도 배척당해왔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라, 불교국 일본의 종교기준대로 하면, 세계종교 유교도 종교아닌 사회규범이 되어, 일본 신도(불교에서 파생됨), 불교, 기독교만 포교종교고, 유교는 일제강점기의 신생종교인 원불교보다 신자수가 적은 50만(성균관.향교의 제사인구만 유교도라고 1980년대 초반에 통계청 표본조사를 실시하여, 다시 유교에 도전하고 있음)이 되어, 해방한국의 종교주권을 침해당하게 됨. 그래서,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 가톨릭의 교과서.학술적 자격이 있는 세계사와 한국사, 국민윤리(유교나 기독교등의 세계종교를 교육)등의 종교자격을 적용할 수 밖에 없음. 근대 세계의 지배세력이던 서유럽의 학자들의 이론으로 이루어진 학교교육의 모든 교과목들임. 중국(황하문명, 세계 4대발명품인 종이,화약,나침판, 인쇄술의 중국 발명품이 세계사의 세계 4대 발명품임)이나 유교, 중국의 대학제도(한나라 태학, 위나라 태학, 이후의 수.당송의 국자감, 원.명.청의 국자감, 원.명.청의 국자감에 계승된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는 분명 세계사의 가장 큰 혜택을 보아온 세계적 자격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 문화대혁명으로 모택동 주석도 비판받고,중국은 개혁.개방정책으로, 유교 전통명절인 춘절, 중추절, 청명절, 단오절의 4대명절 공휴일을 아주 길게 하였음. ​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 유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http://blog.daum.net/macmaca/3131 *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입니다. 유교는 국교로,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책은,불교 해인사를 재단으로 둔, 불교 Monkey 학교에서 공부한 저자가,한국에 주권.자격.학벌없는 패전국 불교 Monkey일본의 잔재로, 패전국 노예로 남아 식민지 잔재세력과 발호해온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식의 대중언론 사고방식에 영향받아서, 불교 Monkey식으로 마음대로 지은 책이라 보여집니다. 2000년도 초에 나왔다고 합니다. [5]. 삼국사기에 남해왕이 무당역할을 하였다는 설명. 남해 차차웅[ 南解次次雄 ] 원전서지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시대명 신라 재위기간 4년 ~ 24년 연도 4년 ~ 24년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차차웅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방언으로 무당을 이르는 말이다. 무당이 귀신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까닭으로 사람들이 무당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르신을 자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혁거세의 큰아들로서, 몸집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착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아루부인(阿婁夫人)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를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南解次次雄立[次次雄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 爲慈充] 赫居世嫡子也 身長大 性沈厚 多智略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一云阿婁夫人] 繼父卽位 稱元 사관이 논평한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고 해를 넘겨 원년이라고 하는 법도는 『춘추(春秋)』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절대적인 선왕의 법도이다. 「이훈(伊訓)」에는 “성탕(成湯)이 이미 죽었으니 태갑(太甲) 원년이다.”라고 하였으며, 『정의(正義)』에도 “성탕이 이미 죽었으니 그 해가 곧 태갑 원년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맹자(孟子)』에는 “탕이 죽고, 태정(太丁)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외병(外丙)이 2년이요, 중임(仲壬)이 4년이었다.”라고 하였는데, 『상서(尙書)』에 몇 글자가 빠져 있어서, 『정의』의 이 부분에 대한 해설이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옛날에는 임금이 즉위하면 그 달을 넘긴 다음 달을 즉위 원년이라 일컫기도 했고, 혹은 그 해를 넘긴 다음 해를 즉위 원년이라고 했다.”라고 말한다. 즉위한 달을 넘기고 나서 원년이라 한 것으로는 ‘성탕이 죽으니 태갑 원년이라 하였다.’는 말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맹자』에서 “태정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라고 한 것은 태정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며, ‘외병이 2년, 중임이 4년’이라고 한 것은 태정의 아들인 태갑의 두 형이 태어난 지 2년 혹은 4년 만에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리하여 태갑이 탕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기(史記)』에서 이를 중임과 외병의 두 임금으로 한 것은 잘못이다. 전자에 따르면 선왕이 죽은 해를 즉위 원년이라 불렀으니 이는 옳지 않으며, 후자에 따르면 상(商)나라 사람의 예법에 맞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論曰 人君卽位 踰年稱元 其法詳於春秋 此先王不刊之典也 伊訓曰 成湯旣沒 太甲元年 正義曰 成湯旣沒 其歲卽太甲元年 然孟子曰 湯崩 太丁未立 外丙二年 仲壬四年 則疑若尙書之脫簡 而正義之誤說也 或曰 古者 人君卽位 或踰月稱元年 或踰年而稱元年 踰月而稱元年者 成湯旣沒太甲元年 是也 孟子云 太丁未立者 謂太丁未立而死也 外丙二年 仲壬四年者 皆謂太丁之子太甲二兄 或生二年 或生四年而死 太甲所以得繼湯耳 史記便謂此仲壬外丙爲二君 誤也 由前 則以先君終年 卽位稱元 非是 由後 則可謂得商人之禮者矣 원년(서기 4) 가을 7월, 낙랑(樂浪)의 병사가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측근들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적은 우리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전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얼마 후에 그들이 물러갔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圍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隣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妄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3년(서기 6) 봄 정월, 시조묘를 세웠다. 겨울 10월, 초하루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年 春正月 立始祖廟 冬十月丙辰朔 日有食之 5년(서기 8) 봄 정월, 임금이 탈해(脫解)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큰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五年 春正月 王聞脫解之賢 以長女妻之 7년(서기 10) 가을 7월, 탈해를 대보(大輔)로 삼고 병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七年 秋七月 以脫解爲大輔 委以軍國政事 8년(서기 11),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八年 春夏旱 11년(서기 14),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노략질하기에, 6부의 날랜 병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낙랑이 나라의 내부에 빈틈이 있다고 여기고, 금성을 공격하여 쳐들어오니 상황이 위급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적병이 두려워하며 퇴각하다가 알천(閼川)가에 주둔하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놓고 물러갔다. 6부의 병사 1천 명이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토함산(吐含山)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러 이 돌무더기를 보고는 적의 무리가 많은 것으로 알고 추격을 멈추었다.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 以禦之 樂浪謂內虛 來攻金城 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 至閼川 見石堆 知賊衆 乃止 13년(서기 16) 가을 7월, 그믐 무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三年 秋七月戊子晦 日有食之 15년(서기 18),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 메뚜기떼가 나타났다.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十五年 京城旱 秋七月 蝗 民饑 發倉廩救之 16년(서기 19) 봄 2월,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주워서 바쳤다.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 獻之 19년(서기 22),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람이 많이 죽었다. 겨울 11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十九年 大疫 人多死 冬十一月 無氷 20년(서기 23) 가을, 태백(太白, 금성)이 태미(太微)성좌에 들어갔다. 二十年秋 太白入太微 21년(서기 24), 가을 9월, 메뚜기떼가 나타났다. 임금이 돌아가셨다. 사릉원(蛇陵園)에 장사 지냈다. 二十一年 秋九月 蝗 王薨 葬蛇陵園內 . 출처:남해 차차웅 [南解次次雄]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6].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서 설명하는 한국의 무당. 정의 신을 섬기고 굿 의례의 집전을 전문으로 하는 종교인. 내용 무인(巫人)·무(巫)·무격(巫覡)·무녀(巫女)·단골·심방이라고도 하며, 특히 남자무당을 지칭할 때는 격(覡) 또는 박수, 화랭이, 양중이라고도 한다. ≪주자어류 朱子語類≫에 의하면 ‘무’는 춤을 통하여 신을 접하기 때문에 공(工)자의 양측에 두 사람이 춤을 추는 형상을 취한 ‘巫(무)’자를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무당은 춤으로써 무아의 경지에 돌입하여 탈혼(脫魂)의 과정을 거쳐서 신과 접하게 되고, 거기에서 신탁(神託)을 통하여 반신반인(半神半人)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무당은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고하고, 또 신의 의사를 탐지하여 이를 인간에게 계시해주는 영매자(靈媒者)로서의 구실을 맡게 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대부족국가 때부터 무는 곧 ‘군(君)’인 동시에 신과의 교섭자로서의 위치에 있었고, 그 활동은 초인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무인의 직능은 신열(神悅, ecstasy)을 공동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활용할 줄 아는 신성(神聖)의 전문가로서의 구실이었다. 이와 같은 무의 직능은 삼한 여러 나라의 천군(天君)이나 부여의 영고(迎鼓), 예(濊)의 무천(舞天) 등 국가적 대제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의 무인은 일반 사회인들과는 구별되는 초인적 이질성을 부여받은 자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무는 보통 인간이 미칠 수 없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영매자로서, 그 개념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무당은 성무과정(成巫過程)의 시초에 신의 초월적인 영력을 체험하는 신병(神病)을 거친 사람이어야 한다. 이때의 신병은 신의 부름을 따르는 종교현상이며, 신과 통하는 인격전환의 계기가 되는 체험이다. 둘째, 무당은 신병을 통하여 얻은 영통력으로 능히 신과 만나는 종교적 제의인 굿을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굿은 무당이 행하는 종교적 표현의 핵심이 된다. 따라서 신병을 체험하여 영통력을 얻은 사람이라도 그 종교적 표현이 되는 제의를 독경식이나 불교식에 의존한다면 무당 본래의 제의인 굿과는 이질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셋째, 앞의 두 가지 조건을 기반으로 하여 민간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종교적 지지를 받아 민간층의 종교지도자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넷째, 무당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이 분명하여야 한다. 성무 초기에 어떤 신을 어떻게 체험하였으며, 그 신을 어떻게 신앙하느냐 하는 것이다. 무당이 체험하는 신은 일반적으로 산신·칠성신·지신·용신 등의 자연신, 또는 장군신·대감신·왕신 등의 인격신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무당의 유형은 크게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로 나눌 수 있다. 강신무는 강신체험을 통하여 된 무당으로서, 그 성무 동기는 강신으로 인한 신의(神意)에 있다. 이러한 무는 우리 나라 중부 및 북부지방에 많다. 그 주된 기능은 강신으로부터 얻은 영력으로 점을 쳐서 미래사를 예언하고, 제의 때는 사제인 동시에 그 몸에 신이 실려서 신격화한다. 그리고 ‘공수[神託]’를 내려 신의 뜻을 무당의 육성으로 전한다. 제의 때에는 무당의 몸에 신이 내려 신격화하기 때문에 신과 무가 일원화현상을 나타내게 된다. 강신무의 신사(神事)에는 대형의 신간(神竿)이 사용되지 않으며, 신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소박한 상태의 것이다. 강신무의 무복은 각 제차마다 개별신들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옷이 있어 보통 12∼20종에 이른다. 제의에 사용되는 무구(巫具)로서는 타악기가 위주가 되며 가무의 가락과 속도가 몹시 빠르고 몹시 흥분된 도무(跳舞)가 따른다. 한편, 세습무는 혈통을 따라 사제권이 대대로 계승되는 무당으로서, 성무의 동기는 사제권의 인위적인 세습에 있다. 이러한 무당은 남부지방에 우세한데, 주된 기능은 영력과 관계없이 제의를 집행하는 사제의 구실이다. 이들의 신사는 강신이나 신탁이 거의 없는 상태로서, 그들은 신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의 체험을 통한 ‘몸주’신이 없다. 그러므로 신단(神壇)을 만들어서 신을 봉안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제의 때에는 신과 무당이 대치하는 이원화현상을 보이며, 신사 때에는 신이 내려오는 길을 상징하는 신간을 꼭 설치하게 된다. 세습무의 무복은 극도로 축소되어 대부분 2, 3종 정도의 무복으로써 제의를 진행시키며, 무구로는 타악기 이외 취타악기·현악기까지 다양하게 동원한다. 그리고 노래의 가락이나 춤의 속도는 완만하다. 또한 무당의 유형은 그 특성에 따라 무당형·단골형·심방형·명두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무당형에는 주로 중부와 북부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무당과 박수가 해당된다. 강신체험에 의하여 영력을 가지고 있으며, 강신한 몸주신과 그 몸주신을 모신 신단이 있고, 신의 실재를 확신하는 신관이 구체화되어 있다. 가무로 정통굿을 주관하는 사제인 동시에 영력에 의해서 점을 치기도 하는 무당이다. 단골형에는 호남지방의 단골과 영남지방의 세습무가 해당된다. 단골형은 혈통을 따라 사제권이 세습되고, 사제권에 의한 ‘단골판’ 곧 일정지역의 관할권이 계승되며, 이것들이 무속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무당형과 달리 강신 체험이 없어 영력이 없고 구체적인 신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자기집에 신단을 갖추고 있지 않다. 신을 향한 일방적인 가무로서 정통굿을 주관하는 사제이다. 그런데 영남지역 세습무의 경우 호남지역 단골의 ‘단골판’과 같은 관할구역제가 희박한 것으로 보이지만, 과거에 이러한 제도가 있었다는 사례로 보아 호남지역의 단골과 영남지역의 무당은 동계의 제도화된 무로 보인다. 심방형은 제주도에 분포되어 있는 무당을 지칭한다. 이 심방형은 단골형과 같이 무의 사제권이 혈통에 의하여 계승되는 세습무로서 무속상의 제도화된 일면을 보인다. 무당형과 같이 영력을 중시하며, 신의 인식이 확고하여 구체화된 신관이 확립되어 있으나 자기집에 신단은 없다. 직접적인 강신 영매가 없이 매개물인 무점구(巫占具)를 통해서만 신의 뜻을 물어 점을 칠 수 있고, 신을 향하여 일방적인 가무로 정통굿을 주관하는 사제이다. 따라서, 심방형은 단골형과 무당형의 중간형태로 볼 수 있는데, 제의 때 무가 신격화하지 못하는 점에서 단골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명두형은 죽은 아이의 영[死兒靈]의 강신 체험을 통해서 된 무당인데, 강신된 영(靈)은 혈연관계가 있는 아이의 영이다. 여자아이의 영이 내린 무를 ‘명두’, 남자아이의 영이 내린 무를 ‘동자’ 또는 ‘태주’라고도 한다. 남부지역, 특히 호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중부와 북부지방에도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명두형은 죽은 아이의 영이 강신되어 이 영에 의한 점복을 전문으로 하는 점쟁이로, 몸에 실린 죽은 아이의 영을 자기집의 신단에 모시고 이 사령을 불러 점을 치는 초령술(招靈術)을 지니고 있으나, 가무로 정통굿을 할 수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무당형과 명두형은 강신에 의한 영통력이 주된 기능이어서 이 둘은 강신무계통이며, 단골형과 심방형은 사제권이 제도적으로 세습화되는 세습무계통으로 구분된다. 영력을 가진 강신무는 성무하는 시초에 반드시 신병을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신병체험은 무당이 영력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무당이 될 사람에게 신이 내리면 정신이상증세가 오고 신체상에도 이상질환증세가 나타나 장기간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신병의 증상은 우연히 시름시름 앓고 밥을 먹지 못하며 물만 마신다. 몸이 말라 허약해지면서 사지가 뒤틀리거나 한쪽 머리·가슴·팔 등이 아픈 편통증의 증상이 일어난다. 정신상태는 마음이 들떠 안정할 수 없고 꿈이 많아지며, 꿈속에서 신과 접촉하는 성스러운 모습을 보거나 어떤 지시를 받기도 한다. 이런 꿈이 거듭되면서 꿈과 생시의 구분이 흐려지고 생시에도 신의 환상·환각·환청을 체험한다. 그러다가 증세가 심해지면 미쳐서 집을 뛰쳐나가 산이나 들판을 헤매고 다닌다. 이러한 신병은 처음에는 신체질환에서 정신질환으로 옮겨지는데, 병기간이 평균 8년, 길게는 30년 동안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의약치료로는 쾌유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키기 때문에 강신된 신을 받는 내림굿을 하여 무당이 되어야만 치유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내림굿을 하여 치유되었다고 해서 굿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전과 같은 신병의 증세가 재발하기 때문에 무당이 되는 것은 신이 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내림굿을 하여 신을 받은 뒤 내림굿을 해준 무당을 선생으로 맞아 강신자는 그를 따라다니며 굿하는 기능을 배워서 무당으로 독립하게 된다. 무당의 기능을 배우는 기간은 약 3년이고, 선생무당을 신어머니로 삼으며, 강신자가 여자일 경우는 신딸, 남자일 경우는 신아들이 되는 신계조직(神系組織)이 성립된다. 세습무의 성무 과정은 호남의 단골과 영남의 무당이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호남의 단골에게는 각각 단골판이라는 일정한 관할구역이 주어져 있다. 이 단골판 안에서의 제의나 사제권은 단골판의 소유권과 함께 혈통을 따라 대대로 세습되고, 이 사제권의 계승에 따라 단골이 된다. 그러나 사제권은 부계를 따라 계승되고, 직접 굿을 하는 것은 남자가 아닌 여자여서, 여자가 사제권을 소유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이 단골이 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혼인이 되면 남자의 어머니인 시어머니 단골이 며느리를 굿판에 데리고 다니면서 굿하는 기능을 가르쳐 완전한 무당을 만든다. 영남지방의 무당은 호남지역의 단골과 같은 단골판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과거에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무당이 되는 과정은 호남의 단골과 동일하다. 이들 세습무는 사제권의 소유자와 무계혼(巫系婚)으로 결합한 뒤 학습을 통하여 성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강신무의 성무 동기는 강신인 데 비하여 세습무의 성무 동기는 사제권의 혈연적 세습이다. 고대부족국가에 있어서의 ‘무’는 제의를 주재하고 정치를 하는 군(君)의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분화되어 제(祭)와 정(政)이 분리되면서 무는 사제기능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제·치병·예언 및 유희적 기능이었다. 첫째, 사제의 기능은 무의 원래 기능이었다. 따라서, 무는 각종 거국적인 치제(致祭)에 공적 주술자로서 관여하는 동시에 개개인의 무사(巫事)에 사적 주술자로서도 관여하였다.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 주술을 행하는 공적 주술자들은 고정된 장소에서 무의(巫儀)를 주관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대한 보수를 직접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에 비해서 사적 주술자들은 개개인의 안녕을 위하여 주술을 행하는데, 이들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무의를 주관하고 그에 대한 보수를 요구한다. 현재는 사적 주술자의 사제기능만이 행해지고 있다. 둘째, 치병의 기능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라 유리왕 19년(42) 9월 왕이 병에 걸렸을 때 무당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여 병이 나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무의 치병기능은 조선사회에서도 여전히 발휘되었다. 세종 때 열병이 유행하게 되자 세종은 무격들을 동원시켜 병을 고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구병 활동에 힘쓰지 않는 무격들을 크게 논죄하는 한편, 구병에 힘쓴 무격에 대해서는 무세(巫稅)를 감하여주고 부역을 면제하여주었던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왕 자신이나 궁중의 사람이 병을 얻으면 무당을 자주 불러서 이르게 하였고, 일반민중들 역시 질병이 발생하면 무당으로 하여금 쾌유를 빌게 하였다. 이처럼 병이 발생하면 무격에 의하여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무당은 그들의 사회로부터 치병의 기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무당을 도성 안의 병자구호를 주임무로 하는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에 소속시켜 관에서 직접 무당들을 지휘통솔하기도 하였다. 이는 무당들을 구병 행위에 쉽게 동원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셋째, 무당은 미래사를 예지하는 예언적 기능을 발휘하였다. 전문적 점자(占者)인 이들을 나라에서는 제도적으로 대우하기도 하였다. 즉, 삼국시대의 관상감(觀象監), 고려시대의 태사국(太史局), 조선시대의 서운관(書雲觀) 등이 이러한 직제의 하나였다. 그리고 여기에 소속되었던 일관(日官)·일자(日者)·무사(巫師)·점자(占者) 등은 모두가 예언의 기능을 인정받았던 무인이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대사를 결정하기에 앞서 무인들의 예언을 들었고, 일반 민중들 역시 크고 작은 일이 있으면 무당을 찾아가서 미래를 점치는 일이 크게 성행하였다. 이때 무인들은 한결같이 ‘지신강아(至神降我)’라고 하여 신이 곧 자기의 육신에 접하였음을 자처하였고, 자기가 말하는 것이 곧 신의 계시임을 강조함으로서 그 예언이 절대적임을 믿게 하였다. 넷째, 유희적 기능 역시 상고시대부터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의에 임한 무당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도약을 하고 공수한다. 이것이 제삼자의 눈에는 일종의 유희로 반영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파제(罷祭)에서 참여자들이 한데 어울려 먹고 마시며, 무당과 더불어 춤추고 노래부름으로써 그 제의가 발휘하는 유희적 기능은 절정에 달하게 된다. 후대에 내려올수록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유희적 본능은 점차 노골화하여 마침내 무제(巫祭)는 ‘굿·놀이·풀이’로 변하였다. 특히, 무제의 제차 중에서도 신을 즐겁게 하는 ‘오신 행위(娛神行爲)’는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굿이 되었다. 이 오신 행위로 인하여 굿은 주술적 신성성이 약화되고 오락적인 경향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집행하는 무당이 흥미위주의 유희로 전개시켜 나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무당이 성욕이나 물욕, 저주행위 등 나쁜 일에까지 깊이 관여하였던 조선 후기에는 그 신분이 크게 하락하였다. 무당 스스로의 타락은 신분의 하락을 자초하였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무속신앙 자체가 미신으로 간주되게 됨에 따라, 무당은 음성적인 사제자·치병자·예언자로 취급당하고 있다. .출처: 무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 서주시대의 종교 담당 직책 관련, 서주시대의 종교담담 관리는 6卿의 신분이었음. 총재관(總裁官)·백관(百官)의 수장 3공(公) 태사(太師)·태보(太保)·태부(太傅). 서주 시대에 천자의 교육과 고문(顧問), 충간(忠諫) 등을 담당하고 국정을 총괄하던 백관의 영수. 전(轉)하여 최고급 관료의 범칭으로도 사용됨. 각각의 부관(副官)으로 소사(小師)·소보(小保)·소부(小傅) 등을 두었음. 6경(卿) 태사(太史)·태축(太祝)·태복(太卜)·사도(司徒)·사마(司馬)·사공(司空)의 6관. 3공 다음가는 자리에 위치해 백관을 거느리면서 각종 행정 업무를 분담하여 총괄한 각 방면의 최고 장관. 태사·태축·태복은 대사료(大史寮, 서주 관직 체계를 크게 양분한 2대 진영 중 주로 종교적·의례적 업무를 담당하던 쪽)에 소속되어 국가 종교·의례·교육·제사 업무 등을 관장하였고, 사도·사마·사공은 경사료(卿事寮, 서주 관제(官制)의 2대 진영 중 행정적·재정적 업무를 담당하던 쪽)에 소속되어 각종 재정·경제·군사·건축 업무들을 관장하였음. 왕실·궁정(宮廷) 업무 담당 태재(太宰) 왕실 사무와 궁정 업무를 총괄하는 궁관(宮官), 조관(朝官)의 수장. 재부(宰夫) 천자나 제후의 어찬(御饌)을 담당하는 관리. 부관으로 우재(右宰), 좌재(左宰)를 두었음. 의례(儀禮)·종교 의식 담당 대종백(大宗伯) 국가 의례, 제사, 종교 의식을 총괄하는 예관(禮官)의 수장. 태사(太史) 국가의 천문·역법(曆法)·점복(占卜)과 각종 관방 문서들의 기록 및 보관을 총감독하던 사관(史官)의 수장. 축사(祝史) 의례나 종교 의식 거행 시의 축문(祝文) 작성, 낭독, 보관 등을 담당한 직책. 무사(巫史) 강신(降神) 의식과 주술(呪術)을 담당한 직책. 교육·고문(顧問) 담당 대사도(大司徒) 현재까지 2종의 설이 있음. ① '司徒'를 '무리(徒)를 관리한다'는 의미로 해석해 국가 교육 업무를 총괄하는 교육관의 수장으로 보는 견해와, ② '사도(司徒)'를 '사토(司土)'가 와전(訛傳)된 것으로 보고 '사토(司土)'를 '토지를 관리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농업을 비롯한 각종 생산을 관장하고 나아가 국가의 경제와 재정 업무 전반을 총괄하던 재정관의 수장으로 보는 견해가 병존하고 있음. ①의 견해를 빌릴 경우 대사도를 교육관의 수장으로 볼 수 있음. 동궁태부(東宮太傅) 일명 태자태부(太子太傅). 태자 교육 및 고문을 담당하는 관리. 동궁소부(東宮小傅) 일명 태자소부(太子小傅). 동궁태부의 부관(副官). 사씨(師氏) 대사도에 소속되어 각종 세부적인 교육 업무를 맡아보던 관직들의 통칭. 재정·경제 담당 대사도(大司徒) 앞에서 설명한 사도(司徒)의 의미로 볼 경우 대사도를 재정·재무 담당 장관으로 볼 수 있음. 대사공(大司空) 국가의 모든 공사(工事), 건축(建築) 업무를 총괄하는 공관(工官)의 수장. 휘하에 각종 기술을 지닌 공관(工官), 공인(工人)들을 거느렸음. 장고(掌庫) 국가 창고를 관리하는 감독관. 보통 '掌'이 붙은 관직들은 세습된 것으로 추정됨. 사고(司庫) 국가 창고 감독관. '司'가 붙는 관직들은 대체로 그 방면의 수장급 고관들을 지칭. 사시(司市) 각 지방의 시장 교역을 관리하고 감독하던 직책. 군사 담당 대사마(大司馬) 군사(軍事) 업무를 총괄하는 군관(軍官)의 수장. 본래는 '말을 관리한다'는 의미였으나 말이 군사에 필수불가결한 자원인 까닭으로 점차 군사를 총감독한다는 의미로 확대되었음. 춘추 시대 후기에 장군(將軍) 관직이 등장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제후국들에서 점차 도태되었으나 유독 남방의 초(楚)나라에서는 전국 시대 말기까지도 존속되었음. 군정(軍正) 군대의 기강(紀綱)과 군율(軍律) 숙정, 각 계급 군사(軍士)의 임면(任免), 승강(昇降), 상벌 및 군사 문서 등을 담당하던 직책. 어자(御者) 천자나 제후의 수레를 모는 마부. 사사(士師) 군율, 군법 및 군사상의 분규, 재판, 소송 관련 업무를 맡아보던 직책. 법률 담당 대사구(大司寇) 국가의 사법, 소송, 재판, 형옥(刑獄) 업무 등을 총괄하던 사법관의 수장. [네이버 지식백과] 서주 시대의 관직 (열국지사전, 2001. 6. 15., 풍몽룡, 김구용) [8].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시고, 주나라에 멸망당한후, 송나라 제 1대 군주가 된 송(宋)나라 미자의 후손 공자님. 1]. 개략적 설명.공자님은 공자님은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시고, 주나라에 은나라가 멸망당한후, 주나라가 은나라 제사를 이어받도록 허용한 宋나라의 제 1대 군주(君主) 미자의 후손이십니다.더욱 구체적으로는 미자의 후손 중 불보하(弗父何)의 후손이십니다. 성균관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송나라는 제 6대 양공희에 와서 조카인 여공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는데, 양공희에게는 이때 아들 불보하(弗父何)가 있었다. 그가 공자의 조상이다. 2]. 은나라 왕의 후손으로, 주나라가 은(상)을 멸망시킨후, 주나라가 은나라 제사를 이어가도록 허용한 송(宋)나라 제 1대 군주 미자(微子). 1. 중국 역대인물 초상화에 나타나는 미자(微子)에 대한 설명. 성은 자(子)이고, 이름은 계(啟)이다. 당시 사람들은 ‘미자(微子)’를 ‘미자계(微子啟)’라고 불렀다. 송(宋)나라의 제1대 군주(君主)이다. 상왕(商王) 제을(帝乙)의 장자로 주왕(紂王: 은(殷)나라 최후의 임금)의 서형(庶兄: 서모에게서 난 형)이다. . 출처:미자[微子, wēi zǐ]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2. 중국 인물사전에서 설명하는 미자(微子)에 대한 설명. 미자 은(상)나라 말기 3명의 현자 중 한 명 [ 微子 , wēi zǐ ] 요약 송나라 제1대 군주 미자의 초상화 이미지 크게보기 미자의 초상화 시대 고대 상(은)나라~주나라 출생-사망 미상 목차 1). 은(상)말삼인(殷末三仁) 2). 주 무왕 휘하로 들어가다 3). 제후국 송(宋)의 건국 4). 관련 유적 1). 은(상)말삼인(殷末三仁) 미자는 성이 자(子)이고, 이름을 계(啓)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미자를 ‘미자계(微子啟)’라고 불렀다. 『사기』 「송미자세가」에는 개(開)로 나오는데 이는 한나라 경제의 이름이 유계여서 그 이름자인 계를 피한 것이다. 은(상)나라 말기 3명의 현자를 뜻하는 ‘은말삼인’ 중의 한 사람이다. 미자는 상나라 왕 제을(帝乙)의 큰아들이자 마지막 왕 주의 배다른 형이다. 주가 임금으로 즉위하여 포악한 정치를 일삼자 미자가 여러 번 충고했지만 주는 듣지 않았다. 이에 미자는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상나라를 떠났다. 당시 미자는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골육의 정이 있고, 군주와 신하는 의리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아비에게 잘못이 있을 때 자식은 세 번을 충고하고도 듣지 않으면 계속 통곡한다. 신하가 세 번을 충고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 의리상 떠나도 되는 것이다.”라 했다. 당시 태사(太師)와 소사(少師)1)도 미자에게 떠날 것을 권했다. 은말삼인 중의 한 사람인 비간은 직언을 하다가 가슴이 쪼개지는 형벌을 받고 죽었으며, 또 한 사람 기자는 미친 척하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2). 주 무왕 휘하로 들어가다 주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고 상나라를 멸망시키자 미자는 바로 제기(祭器)를 들고 군문(軍門)으로 가서, 웃통을 벗고 등 뒤로 손을 묶은 다음 (사람을 시켜) 왼편으로는 양을 끌고 오른편으로는 소꼬리를 장식한 깃발을 쥐게 하고는 무릎으로 기어 앞으로 나와 무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무왕은 미자를 석방하고 전과 같이 관직을 회복시켰다. 무왕은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으로 하여금 상나라의 제사를 잇게 하고, 자신의 동생 관숙과 채숙을 시켜 그를 돕게 했다. 3). 제후국 송(宋)의 건국 무왕이 세상을 떠난 후에 어린 성왕이 즉위했으나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旦)이 조카 대신 나라의 정치를 대행했다. 관숙과 채숙이 주공에게 의심을 품고 무경(녹보)과 함께 난을 일으켜 성왕과 주공을 습격하려 했는데, 이것이 삼감의 난이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아 무경을 베고 관숙을 죽였고 채숙은 내쫓았다. 이어 미자를 상의 후손으로 대체하여 선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지어 알린 다음 송에 나라를 세우게 했다.2) 미자가 원래 어질고 유능했기에 무경을 대신할 만 했고, 상나라의 유민들도 그를 매우 사랑했다. 미자가 죽고 동생 연(衍)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미중이다. 사마천은 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무경이 죽자 주 왕실은 미자를 송에 봉했다. 이후 양공이 홍(泓)에서 초(楚)와 싸우다 부상을 입고 패했지만 의리라는 명분을 앞세운 덕에 군자라는 칭송을 얻기도 했다. 경공(景公, ?~BC.453)3)이 겸양의 덕을 쌓으니 좋지 않은 징조인 화성이 이윽고 자리를 바꾸어 물러났다. 그러나 경공은 천성이 포악하여 마침내 멸망했다. 미자가 태사에게 가르침을 청한 뒤 떠난 일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제8 「송세가」를 지었다.” 4). 관련 유적 미자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허난성 상추(商丘)시 쑤이양(睢陽)구에 위치한 미자의 사당 미자사(微子祠)가 대표적이다. 이 사당은 1950년대 초에 훼손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제 때 중수비가 남아 있다. . 출처:미자 [微子, wēi zǐ] - 은(상)나라 말기 3명의 현자 중 한 명 (중국인물사전) 3]. 중국 역대인명사전에서 설명하는 미자(微子)에 대한 설명. 서주(西周) 말기 송(宋)나라의 국군(國君). 은(殷)나라 주(紂)임금과는 동모서형(同母庶兄)이다. ‘미’는 기내(畿內)의 나라 이름인데, 봉작을 받았다. 본명은 계(啓)고, 경사(卿士)가 되었다. 주임금이 음락(淫樂)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여러 차례 간절하게 간했지만 듣지 않자 결국 떠났다. 주무왕(周武王)이 상(商)을 멸망시키자 입에 벽(璧)을 물고 와 항복을 청했다. 주공단(周公旦)이 무경(武庚)을 죽인 뒤 상구(商丘)에 봉했고, 나라 이름을 송이라 했다.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세 왕족(微子, 箕子, 比干)의 한 사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자 [微子]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임종욱, 김해명) 4]. 한국 성균관에서 서술하는 내용. 1. 요약: 공자의 조상은 은나라 왕실과 연이 닿아있다. 한편 미자의 후손 공자에 대한 설명:공자의 조상은 은(殷)왕실과 줄이 닿아있다. 즉, 은나라가 망한 뒤 주공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인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를 송(宋)나라에 봉했다. 송나라는 제 6대 양공희에 와서 조카인 여공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는데, 양공희에게는 이때 아들 불보하(弗父何)가 있었다. 그가 공자의 조상이다. 2. 공자님에 대한 성균관의 자세한 설명중 일부분 B.C 551-479,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대 사상가이며 교육자로 유교의 개조(開祖)시며 성인으로 일컬어진다. 공(孔)은 성이고 자(子)는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선생' 의 뜻이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창평향 추읍(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남쪽 추현)출신.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551년(주왕실 영왕21년, 노양공22년)이라는 설(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과 552년이라는 설(『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이 있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숙량흘은 60세가 넘어 젊은 안징재와의 사이에서 공자를 낳은 것이라고 한다. 안징재는 공자를 낳기 위해서 니구산(尼丘山)에 기도를 들였다 하는데,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가 중니(仲尼)인 것도 니구산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혹은 나면서부터 머리꼭대기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언덕처럼 생겼으므로 이름을 구라고 했다고도 한다(『사기』) 공자의 조상은 은(殷)왕실과 줄이 닿아있다. 즉, 은나라가 망한 뒤 주공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인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를 송(宋)나라에 봉했다. 송나라는 제 6대 양공희에 와서 조카인 여공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는데, 양공희에게는 이때 아들 불보하(弗父何)가 있었다. 그가 공자의 조상이다. 그 뒤로 송나라의 10대 대공(戴公)에서 무공(武公) , 선공(宣公)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재상 정고보(正考父)가 있으나, 그 아들 공보가 (孔父嘉)가 송나라의 정쟁에 휘말렸고(B.C 710)다시 그의 아들 자목금보(子木金父)는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리고 공보가의 '공'자를 따서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자목금보의 현손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며, 숙량흘은 '키가 10척이고 무예와 힘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공자가어』) 『춘추좌씨전』에는 숙량흘이 전쟁에 나가 무공을 세웠다는 기사가 두 군데(양공10, 17년) 기록되어있다. 공자도 용모나 몸집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사기』에는 "키가 9척 6촌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라 부르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공자가 정(鄭)나라에 가서 제자들과 떨어져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의 모습을 정나라 사람의 입을 빌어 "이마는 요임금 같고 목은 고요같고 어깨는 자산과 같으나, 허리 아래편은 우임금보다 3촌이 모자라며 초상난 집의 개처럼 축 늘어져 있더라."라고 표현하였다. 『공자가어』 [곤서(困書)]에서는 '키는 9척 6촌이며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긴 눈에 툭 불거진 이마를 지녔다.' 는 형용을 보탰으며, 한 대 공부(孔)의 『공총자』가언에서는 장홍(弘)이 공자의 인상을 표현하여,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꼬리가 긴 눈과 불거진 이마는 황제(黃帝)의 모습이요, 긴 팔에 거북 같은 등을 하고 9척 6촌의 키를 지니고 있는 것은 탕(湯)임금의 용모이다." 라고 하였다. 이같이 공자는 용모가 비범하였고 체력도 강했다 한다... 5]. 화순 향교지에 나오는 孔子님의 선계(先系) 참고설명 孔子님의 선계(先系) 孔子님의 선계(先系)는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제왕(帝王)인 황제(黃帝)에서 부터 시작하며, 5대 설(契)에 이르러 자씨(子氏)라는 성씨(姓氏)를 받게 되었다. 설(契)은 순(舜)임금의 사도(司徒-국민교육을 담당한 벼슬)로서 훌륭한 업적(業績)을 쌓아 상(商)이란 땅을 봉지(封地)로 받게 되었다. 설(契)의 후손들은 분봉국(分封國)인 상(商)을 잘 다스려 왔으며, 14대 성탕(成湯)에 이르러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쳐 멸(滅)하고 천자(天子)의 자리에 오르니 이가 바로 은(殷)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이다. 그는 설(契)을 은(殷)의 태조(太祖)로 받들어 모셨다. 탕왕(湯王)으로부터 17대 미중(微仲) 연(衍)에 이르러 연(衍)이 송(宋)나라의 공자(公子)가 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孔子님의 직계조상이다. 미중(微仲)에게는 동모형(同母兄)인 미자(微子) 계(啓)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은(殷)의 마지막 임금 주(紂)의 서형(庶兄)이었다. 미자(微子)란 미(微) 땅에 봉해진 자작(子爵)이란 뜻이며, 미중(微仲)은 미자(微子)의 아우라는 뜻이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滅)한 후 성왕(成王-武王의 아들)과 주공(周公-武王의 아우)은 미자(微子) 계(啓)가 죽자 형종제급(兄終弟及)의 고대 관례에 따라 미중(微仲) 연(衍)이 송공(宋公)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미중(微仲)이 송공(宋公) 계(稽)를 낳았으며, 계(稽)로 부터 4대 불보하(弗父何)에 이르러 그는 송공(宋公)이 될 위치에 있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송경(宋卿-宋나라의 卿士)의 자리에 머물러 앉았다. 이 弗父何가 孔子님의 중시조(中始祖)이다. 불보하(拂父何)의 四世孫 정고보(正考父)는 宋나라의 선대(先代)인 湯王이래의 君王들의 위대한 업적들을 찬미한 노래인 상송(商頌)을 정리하였다. 그는 특히 宋의 대(戴), 무(武), 선(宣) 三代를 보좌하면서 세번째 임명을 받고서는 세발솥(鼎)에 그의 겸양(謙讓)의 덕성(德性)을 잘 나타내는 명문(銘文)을 새겼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정고보(正考父)의 정명(鼎銘)인 것이다. 정고보는 공보가(孔父嘉)를 낳았는데 그는 송(宋)나라의 대사마(大司馬-군대의 총책)였다. 그러나 그는 화씨(華氏)의 난으로 살해 되었다. 그후 공보가(孔父嘉)의 四世孫 방숙(防叔)이 송(宋)나라의 핍박을 피해 노(魯)나라로 망명하여 방읍(防邑)의 대부가 되었으며, 방숙(防叔)의 손(孫) 숙량흘(叔梁紇)은 추읍(○邑)의 대부가 되었다. 이 ○邑의 대부의 아드님이 우리 曲阜孔氏의 시조이신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孔子님이시다. 끝으로 그 어른의 선계(先系)를 참고로 아래에 열거하여 둔다. 황제(黃帝)-현효(玄○)-교극(○極)-제곡(帝○)-설(契: 舜의 司徒)-조명(昭明)-상토(相土)-창약(昌若)-조어(曹○)-명(冥)-진(振)-미(微)-보정(報丁)-보을(報乙)-보병(報丙)-주임(主壬)-주계(主癸0-천을〔天乙: 성탕(成湯)-탕왕(湯王)〕-태정(太丁)-태갑(太甲)-태경(太庚)-태무(太戊)-하단갑(河亶甲)-조을(祖乙)-조신(祖辛)-조정(祖丁)-소을(小乙)-무정(武丁)-조갑(祖甲)-경정(庚丁)-무을(武乙)-문정(文丁)-제을[帝乙: 천을(天乙)부터 이상은 은(殷)의 군왕(君王)〕미중연(微仲衍)-송공제(宋公稽)-정공신(丁公申)-민공공〔閔公共: 이상 송(宋)의 공자(公子)〕-불보하(弗父何)-송보주(宋父周)-세보승(世父勝)-정고보〔正考父: 이상 송(宋)의 경사(卿士)〕-공보가〔孔父嘉: 송(宋)의 대사마(大司馬)〕-목금보(木金父)-공기보(孔祈父)-방숙〔防叔: 노(魯)에 망명(亡命)〕-백하(伯夏)-숙량흘(叔梁紇)-공자(孔子) 6]. 사기 공자세가에 공자님이 성인(聖人)의 후손이라 나오는 내용. 필자가 부연하면 聖人이란, 聖王.성천자(聖天子)를 의미합니다. 태고적 조상이신 황제(黃帝:하늘로 승천하시어 계절을 다스리시는 五帝중 가장 높은 중앙의 黃帝로 일컬어집니다)로부터 이어져 은나라때는 탕왕(湯王)을 성인으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요.순.우.탕.문.무같은 성인 임금을 聖人(聖天子)으로 동아시아 유교사회는 오랫동안 존경하고 숭배해 왔습니다. - 사기 공자세가 내용중 일부- 공자가 17세 때 즉 기원전 535년 노나라 대부 맹리자(孟釐子)⑫가 병이 들어 임종시에 그의 후계자인 아들 의자(懿子)에게 당부했다. 「공구(孔丘)는 송나라에서 멸족된 성인(聖人)의 자손이다. 그 조상인 불보하(弗父何)⑬는 원래 송나라 군주의 적자였으나 그의 동생인 려공(厲公)에게 군주의 자리를 양보했다. 정고보(正考父)⑭ 때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으로부터 세 번 명을 받았는데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했으며 그래서 정(鼎)에 세겨 넣기를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절을 한 뒤에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가운데를 걷지 않고 담장 곁에 붙어 다녔으나 아무도 감히 그를 경멸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鼎)에 ’풀과 죽을 쑤어 먹으며 청렴하게 살았다’라고 기록했을 정도로 그의 선조들은 청렴하고 공손했다. 내가 듣기에 성인의 후손들은 군주의 자리에 앉지는 못해도 필시 귀한 신분에 이르는 자가 있다고 했다. [9]. 불법.강제의 일제 강점기동안,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규범으로 오도되었던 세계종교 유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가 전통적인 세계종교 국가의 일원)인데, 한국 유교가 종교로 분류되지 않던 암흑기임. 이승만 대통령때, 삼강오륜의 유교국가를 주창하여, 그렇게 유교국가로 잘 살다가, 1980년대 초반, 연원이 짧고 주권도 없는 일제 강점기식 사고방식을 가진 왜구 서울대 출신등이, 표본조사로 유교를 오도하여, 10년정도 간격으로 실시하는, 통계청 종교인구 표본조사로, 성균관.향교의 제사인구 50만명만 유교도라고 터무니없고 주권없는 발상으로, 유교를 다시 왜곡하기 시작하였음. 1]. 불법.강제의 불교 Monkey 일제 강점기동안,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는 사회규범으로 분류되어, 포교를 하지 못하고, 일본의 종교인 일본 신도(불교에서 파생된 후발 국지적 신앙), 불교, 기독교(일본의 극소수 신앙)만 강제 포교하도록 오도되고, 발이 묶였다가, 해방을 거치며,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의 전통대로, 모든 국민은 유교의 한문 성명과, 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가로 복구되었습니다.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2]. 종교라는 용어는, 영어 Relgiin을 번역한 용어인데, 해방이후 한국의 학교교육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학술용어.표준용어로, 서양식 교과서 교육을 받으면서, 정립된 사후개념의 용어입니다. 학술용어.표준용어를 쓰는게, 학술활동이나, 학교교육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규격화된 용어이기 때문에, 다른 용어를 쓰게되면, 학술활동이나, 학교교육의 교과서 용어와 배치되어, 혼란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해방이후의 사후도입용어인, 종교(Religion)라는 용어를 쓰는게, 가장 적절합니다. 가톨릭의 학술용어인 Religio christiana는 그리스도교를 의미합니다. 한국의 학교교육에서, 세계사, 국민윤리는 세계종교로 유교와 기독교등을 언급하고 았습니다. 그리고 종교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사도 국교나 종교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원래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권 국가들(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에서는 종교라는 사후 번역어 이전에, 유가(儒家, 해방이후 학교교육에서 유교), 도가(도교), 묵가, 음양가, 법가, 인도발 외래 신앙인 불가(불교)등 家라는 용어로 명칭을 붙여왔습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한국의 학교교육에서는 유가나, 기독가, 도가, 불가, 또는 신앙이나 믿음이라는 용어로 교육을 시키지 않는게 일반적입니다.그런데, 한국에 주권없는 패전국 불교 Monkey 일본 잔재둘이, 1980년대 중.후반부터, 유가였으니까, 유교가 종교용어가 아니다라는 이상한 루머.야사식 주장을 하여, 유교가 종교가 아니다, 또는 유교가 종교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는 시비를 거는현상을 낳고 았습니다. 일본잔재식 발상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상한 언어유희에 말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3]. 일제강점기는, 세계종교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오도하던 불법 점거시대라, 그당시에 쓰여진 인쇄물들은, 전부 왜곡되거나 약간 비틀어진 내용들입니다. 그 때는, 강제포교종교인 일본신도(일본의 국교,불교의 파생신앙),불교,기독교(일본의 극소수 신앙)만 포교할수 있던 시대라, 교육.종교.문화측면에서, 이러한 내용들을 정사로 착각하면 않됩니다. 조선.대한제국의 기준과 법, 역사만이 정사영역입니다. 을사조약.한일병합은 무효입니다. 4]. 고등학교 정규교육을 무시하고, 대중언론이나.야담에서 불교 Monkey 일본과 그 잔재들이 써먹던 약탈만 보고 판단하는 분들도 생겨났습니다. 해방이후 세계종교 유교는, 한국 공교육에서, 세계사, 한국사, 국민윤리 분야애서 확실한 종교교육을 시켜왔습니다. 유교왜곡은 전부 못 먹는감 찔러나 보자는, 패전국 불교 Monkey일본 잔재들(토착왜구들)의 수법입니다. UN적국,전범국, 패전국인 불교 Monkey 일본의 잔재로, 한국에 주권없이 남은 불교 원숭이들의 노예합창임. 5].한국에 무종교인은 없습니다. 해방후 조선성명 복구령으로, 유교국가 조선의 한문성명.본관등록이 의무인, 행정법.관습법상 유교나라 한국.@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다만, 세계종교 가톨릭은 세계사의 수천년 전통으로, 세계종교 유교국 일원인 한국에서는 세계종교 가톨릭의 세계종교 자격을 존중해 주는게 옳습니다.일본기준인, 유교는 종교아닌 사회규범이고, 일본 국교인 신도(일본 불교에서 파생), 불교, 기독교(일본의 소수신앙)만 강제로 포교하던 일제강점기 발상에서 빚어진, 소수 표본조사는 연원도 얼마 않되는 무개념의 주권이 없는 잘못된 발상에서 행해진 것입니다. . 5,000만 한국인뒤 주권없는 패전국 불교 Monkey 일본의 성씨없는 점쇠(일본에서는 천황). 그뒤 한국에 주권.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점쇠가 세운 마당쇠). 그 뒤 새로생긴 일제강점기 초급대 출신대나 기타의 비신분제 대학들. 6].공자님께서는 하느님을 숭배하고, 神明, 조상신을 숭배하는 聖天子들이신 요.순.우.탕.문.무 및 어린조카의 천자자리를 빼앗지않고,섭정으로 잘 처세한 주공의 가르침을 잘 반영하신 성인이십니다. 성인(聖天子)의 후손으로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십니다. 공자님께서, 형조판서격의 대사구도 역임하셨기 때문에, 이전부터의 法을 같이 존중하셨습니다. 재판에 임하면, 공자님도 남들과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재판으로 모든걸 해결하기보다는, 사전에 미리 교화정치를 펴서, 백성들의 선한 마음을 일깨우고, 仁과 禮, 道의 가르침을 베풀어, 모든걸 재판으로 해결하는 방법이전에, 교화의 선행정치를 선호하셨습니다. 한나라때 유교가 국교가 되고, 더불어서 한나라 율령반포는 동아시아 국가들에 율령제도를 확산시켜 유교.율령을 같이 계승해 왔습니다. 7] 공자님께서는 시대의 발전을 반영하여, 시속도 감안하시고, 중용의 개념도 후세에 남기셨습니다. 꼭 선사(先史)시대의 聖天子의 사례로 모든걸 규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문자가 없던 시대 인류의 조상들의 사고방식과, 공자님시대의 사고방식은, 하느님 숭배나, 神明숭배, 조상신 숭배등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모든걸 원시사회의 관행대로 강요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후세의 우리들이, 이런건 잘 분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때, 육체만 창조하신게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도 부여하셨습니다. 8]. 헌법, 국제법, 국사, 세계사로, 혼란기의 우후죽순 주장들에 대처하는 방법이 가장 옳습니다. 물론,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중세시대에는 중남미,필리핀등으로 보급)은 현재 각각 10억명 이상의 오래된 신자를 보유하며, 각종 명절이나, 기념일, 학교교육, 유교의 제사.기도(카톨릭의 예배.기도)등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잘모르며 억압받던 부처 Monkey의 불교도, 일본 불교 Monkey 약탈이후, 최근 다시, 한국에서, 주권없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겉보기는 멀쩡한데, 대중언론이나 야사, 야담, 루머등을 보고, 일본 불교식 주장을 하며, 뭐가 뭔지 모르게 혼동시키고 대중언론에서, 강력하게 항거하니까, 이를보고, 기준을 잃어버리는 파괴시대에 해방한국 유교가 도전받고 있습니다. 9]. 현대의 인간들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늘(天, 하느님)의 초월성.절대성에 대한 숭배에서, 하느님하늘,天)의 존재를 始原的으로 계승하시고 숭배하고 느끼신 상고시대 聖人들의 가르침을 절대 넘어설 수 없습니다. 상고시대 성인들이신 요순우탕문무의 성인임금 및 공자님께서 느끼신 하느님(하늘,天)에 대한 경외감은, 후학들을 통하여, 나라의 국교가 되는 과정을 통하여, 수천년동안, 누구도 뒤바꿀 수 없는 절대적 진리가 되어, 다시 그 믿음을 이어가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이 있습니다. 서양은 예수님을 통하여 그렇게 초월적 하느님을 숭배하고 있습니다.후세의 우리들이 보기에, 공자님께서는 법보다, 무조건 仁이나 서(恕)만 내세우며, 남에게 원망을 듣지 않는 방법만 가르치신걸로 오해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님게서 가장 두려워 하신 절대자는 하늘(天, 하느님)이십니다. 시경에 보면 천생증민(天生蒸民:하늘은 만백성을 낳으심)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0]. 필자는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 출신입니다. 600년 역사의 성균관(성균관대). 해방후 미군정당시 성균관 복구령에 따라, 전국 유림대회(고문:이승만,김구, 위원장:김창숙))에서 성균관대 설치(복구설립)를 결의하였음. 미군정당시 성균관장으로 선출된 김창숙 성균관장은, 전국 유림대회 결의에 따라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기구로 등록(성균관은 제사기구로 분리)하고,국사교육은 이전 관례대로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가 정통승계)에 대한 교육을 실시해왔음. 해방후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에 대항하여 대중언론과 새로생긴 입시지에서,주권.자격.학벌없이 항거해온 마당쇠, 불교 Monkey서울대와 그 밑에서 살아온 일본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나, 서민출신 이용익의 보성전문(동학란을 일으킨 천도교 소속이다, 해방후 김성수가 인수, 고려대가 되어 동아일보에서 서울대 뒤에 붙어 살아옴)은 고구려 태학이후 최고대학 계보인 고려 국자감(통일신라 국학), 고려말 성균관, 조선 성균관, 해방후의 성균관대의 유일무이 최고대학 자격을 극복하지 못해왔습니다. 학과에 상관없이 무슨학과든지 Royal 성균관대(국사 성균관자격), Royal 서강대(세계사의교황반영,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되어, 국제관습법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성균관대(양반대학)와 서강대(가톨릭계 예수회의 귀족대학)만 Royal대며, 일류.명문임. 주권.자격.학벌 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일본 점쇠 천황이 세운 마당쇠 대학), 그 뒤 연세대(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 서민출신 이용익의 보성전문 후신 고려대일것. 성대와 서강대 밖의 리그로 본다면 주권.학벌없는 서울대, 연세대(본캠), 고려대(본캠), 이화여대.이화도 주권.학벌은 없지만, 왜구 서울대가 연세.이화 필요하던 미군정때의 대중언론 도전. 성균관대에 오랫동안 도전을 해와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카르텔은 전분야에서 아주 강합니다. https://blog.naver.com/macmaca/223068858045 [11].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정통승계). 카이로선언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법.국내법적 위상을 상기하고, 패전국 일본잔재로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어온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패전국 일본잔재로 적산재산 형태)를 국립대로 강행할때, 전국적인 반대와 서울대생들의 등록거부.자퇴등이 있었던 상황도 인식해야합니다. 국제법상 일본이 항복후,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라, 한국영토에서 일본의 모든 주권은 없어왔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이 없어왔음. 현행헌법 임시정부 구절(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등 불평등 조약 무효, 대일선전포고)에도 맞지 않는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임.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 성균관(성균관대)교육을 시켜온 나라 대한민국임. 헌법이나, 국제법, 한국사, 세계사의 자격은 대중언론.입시지의 준동을 아랑곳 하지 않는 특질을 가졌습니다.또한 주권.학벌이 없는 서울대와 추종세력의 약탈을 인정해 줄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해방후 미군정기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대중언론.입시지에서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에 도전해 온 한국의 주권.학벌없는 대학들의 약탈기사와 그 과정은 잘 바뀌지 않을것으로 보여집니다. 학과에 상관없이 무슨학과든지 Royal 성균관대(국사 성균관 자격.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 Royal 서강대(세계사의 교황반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서유럽 학자들의 이론으로 이루어진 세계사때문에,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으로 그 자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태학.국자감의 승계대학인 경사대학당 후신 베이징대가, 서유럽의 볼로냐.파리대학처럼 세계사 자격을 인정받을수 있는것임. 그래서, 성균관대 출신인 필자가 유교와 베이징대, 성균관대의 기득권이 대중언론때문에, 인정받지 못할까 염려하여, 세계사를 필요로 해 온것이고, 교황윤허 서강대는 2인 3각 경주처럼, 공생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필요대학으로, 판단하여, 지금까지 그런 사고방식으로 宮성균관대, 御서강대 공생체제의 학벌관을 피력해 온것임. 학과에 상관없이 무슨학과든지 Royal 성균관대, Royal 서강대(성대다음 예우). 성균관대(양반대학)와 서강대(가톨릭계 예수회의 귀족대학)만 Royal대며, 일류.명문임. 그리고 주권.자격.학벌 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일본 점쇠 천황이 세운 마당쇠 대학). https://blog.naver.com/macmaca/223116128129 [12].헌법이나, 국제법, 한국사, 세계사의 자격은 대중언론.입시지의 준동을 아랑곳 하지 않는 특질을 가졌습니다.또한 주권.학벌이 없는 서울대와 추종세력의 약탈을 인정해 줄수도 없습니다. 학과에 상관없이 무슨학과든지 Royal 성균관대(국사 성균관자격), Royal 서강대(세계사의교황반영,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되어, 국제관습법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성균관대(양반대학)와 서강대(가톨릭계 예수회의 귀족대학)만 Royal대며, 일류.명문임. 그리고 주권.자격.학벌 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일본 점쇠 천황이 세운 마당쇠 대학). https://blog.naver.com/macmaca/223068858045 https://blog.naver.com/macmaca/223116128129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정통승계). 카이로선언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법.국내법적 위상을 상기하고, 패전국 일본잔재로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어온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패전국 일본잔재로 적산재산 형태)를 국립대로 강행할때, 전국적인 반대와 서울대생들의 등록거부.자퇴등이 있었던 상황도 인식해야합니다. 국제법상 일본이 항복후,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라, 한국영토에서 일본의 모든 주권은 없어왔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이 없어왔음. 현행헌법 임시정부 구절(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등 불평등 조약 무효, 대일선전포고)에도 맞지 않는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임.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 성균관(성균관대)교육을 시켜온 나라 대한민국임.학과에 상관없이 무슨학과든지 Royal 성균관대, Royal 서강대(성대다음 예우). 성균관대(양반대학)와 서강대(가톨릭계 예수회의 귀족대학)만 Royal대며, 일류.명문임. 주권.자격.학벌 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일본 점쇠 천황이 세운 마당쇠 대학), 그 뒤 연세대(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 서민출신 이용익의 보성전문 후신 고려대일것. 성대와 서강대 밖의 리그로 본다면 주권.학벌없는 서울대, 연세대(본캠), 고려대(본캠), 이화여대.이화도 주권.학벌은 없지만, 왜구 서울대가 연세.이화 필요하던 미군정때의 대중언론 도전. 성균관대에 오랫동안 도전을 해와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카르텔은 전분야에서 아주 강합니다. 헌법이나, 국제법, 한국사, 세계사의 자격은 대중언론.입시지의 준동을 아랑곳 하지 않는 특질을 가졌습니다.또한 주권.학벌이 없는 서울대와 추종세력의 약탈을 인정해 줄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해방후 미군정기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대중언론.입시지에서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에 도전해 온 한국의 주권.학벌없는 대학들의 약탈기사와 그 과정은 잘 바뀌지 않을것으로 보여집니다. 학과에 상관없이 무슨학과든지 Royal 성균관대(국사 성균관 자격.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 Royal 서강대(세계사의 교황반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서유럽 학자들의 이론으로 이루어진 세계사때문에,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으로 그 자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태학.국자감의 승계대학인 경사대학당 후신 베이징대가, 서유럽의 볼로냐.파리대학처럼 세계사 자격을 인정받을수 있는것임. https://blog.naver.com/macmaca/223116128129 [13]. 불교는 하느님.창조신에 대항하는 무신론적 Monkey입니다. 실제로 인도창조신 브라만에 대항하여 부처 Monkey가 만든 불교는 그 발상지 인도에서도 불가촉천민계급입니다. 오래 겪어보면 인간이나 침팬치과의 불교 Monkey가 하느님이나 창조신을 이길수는 없습니다. 1]. 침팬치과의 Monkey부처는 인도창조신 브라만에 항거하여 브라만계급 다음의 세속 신분으로, 창조신 브라만보다 높다고 옆길로 빠졌는데, 불교발상지 인도는 다시 불교를 배격하고 힌두교(브라만숭배)를 믿는 나라입니다. 왕의 칭호도 얻지 못한 배척받는 네팔출신 왕자태생이며, 인도는 불교신자를 가장 밑의 천민계급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불교Monkey 일본 항복후 미군정령인 조선성명복구령을 발효, 전국민이 조선 국교인 유교의 한문성명과 본관을 의무등록하게 하여, 해방이후 한국인은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 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세계종교 유교가 위기에 빠져, 세계사의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의 찬란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필자는 국사(성균관, 해방후의 성균관대)와 세계사(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된 귀족사제 이나시오의 예수회 산하 서강대.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를 병합하여 한국의 Royal.Imperial대학을 유지해왔으며 앞으로도 不變사항입니다. 패전국 일본 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원래 을사조약이 무효(국내법 우선시 강제의 한일병합도 무효)고, 2차대전 패전국으로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그 때부터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은 없어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때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으로도 한국에 주권이 없고, 1988년에 발효된 현행헌법으로 보면 임시정부 조항(을사조약.한일합방 무효, 대일선전포고)에 의해 선전포고한 적국의 잔재로, 주권.자격.학벌없는 패전국 奴隸.賤民대학이기도 합니다. 교과서나 국내법.국제법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데, 적산재산 국유화처럼 국립 서울대로 변신해, 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 및 사설 입시지등에서 그 뒤의 奴卑.下人카르텔을 형성해 최고대학 성균관대에 항거해오고 있습니다. ​ 2]. 인도가 그렇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국도 조선시대에 조계종 승려(산속에 머물러야 하고, 시중에 나오면 않되며 혼자 살아야 함. 5,000만 유교성명 한국인 뒤의 존재들임)를 천민으로 만들어서, 필자는 그 역사적 사실을 어쩔 수 없습니다. 한국에 주권없는 일본 승려는 일본습속대로 결혼도 하고 절도 사고 팔고, 시중에 불교마크 달고 진출해 있습니다. ​ 3]. 다음은 인도의 오랜 불가촉 천민인 불교신자들에 대한 기사입니다. 물론 그후의 이슬람.기독교도 신분은 높지 않습니다만, 불교신자는 오랫동안 천민계급이 인도입니다. 출처는 불교평론 2002년 3월 10일. 기사작성자:이지은. ​ - 다 음 - ​ ....인도는 비록 불교의 발상지이며 고대에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곳이었으나, 마지막 불교 왕조인 굽타 왕조의 몰락과 힌두교의 재기, 뒤를 이은 이슬람 교도들의 침입으로 불교는 탄생의 땅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종교의 ‘불교 죽이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 ...이때 불교로의 개종에 크게 동참하며 개종운동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 ‘달리뜨’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의 카스트 신분제도 중 가장 미천하다고 하는 ‘수드라’ 계급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제5의 신분으로 그림자에만 닿아도 더러워진다는 이른바 ‘불가촉천민’이다... ​ ...인도에서는 지난해 11월에 약 10만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수도인 뉴델리에서 불교로의 개종행사가 열렸고, 그 이후로도 주변의 우따르 쁘라데쉬 주와 비하르 주의 여러 마을에서 수백, 수천 명 규모의 개종식이 조용히 뒤를 잇고 있다. ​ 최근 나타나는 인도인들, 특히 기존 힌두교도들의 불교로의 개종은 이와 같이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집단성’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여러 명이 모여서 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카스트 또는 몇몇 카스트 집단의 성원들이 함께 모여서 개종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들이 개종을 결정하는 방식은 자기 카스트 내에서 나름대로 발언권이 있는 구성원의 건의로 마을 단위의 카스트 회의에서 논의를 거쳐 개종을 결정한다. 그러한 절차를 거치다 보니, A마을의 X카스트가 개종을 한다면 원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X카스트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앞으로 X카스트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불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종에 동참하는 카스트는 거의 예외 없이 달리뜨에 속하는 카스트, 과거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다... ​ ...인도의 전통과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개종’이란 과거나 권위와의 절연을 의미하며 이를 결심하고 감행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또한 앞서 살펴본 신분제와 신분제의 타파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지대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일이다. 이는 불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부터 일어나고 있는 하층민들의 기독교, 이슬람교로의 개종 또는 힌두교 개혁종파의 창시 등도 모두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북인도 지방에서의 불교 개종 움직임도 역시 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면에서 최근의 개종운동은 1956년 이래 마하라슈트라를 휩쓸었던 암베드까르 이후의 개종운동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 그에 비하여 불교는 인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악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는 과거의 카스트 제도나 온갖 불평등과 절연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적합한 조건이 되었다. 또한 그러면서도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한 인도의 종교였고, 더구나 고대 인도의 ‘황금기’에 널리 퍼져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종교이기도 했다. 암베드까르는 독특한 인도사 해석을 통하여 빛나는 불교의 전통을 달리뜨들과 연결시켰다.1) ​ 그는 불가촉천민제의 기원을 4세기경 불교와 브라만교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하던 당시, 끝까지 불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일부 부족민들에 두고 있다. 브라만들은 불교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사제의 권위로 더러운 직업을 강제적으로 부과하고 사회와 격리시켰다. 훗날 승려와 사찰이 점차 사라지고 불교가 인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면서 이들도 힌두교화했지만 이미 대대로 이어지던 더러운 직업 때문에 이들은 불가촉천민으로 굳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암베드까르의 주장은 학술적으로 타당하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지만,2) 불교도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믿음으로 자리잡아 그들이 조상들의 종교를 다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로 믿어진다. ​ 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681 ​ 4]. 중앙일보 2020.09,17 서 유진 기자 보도뉴스. ​ ... "힌두교 불가촉천민들이 불교도로 개종을 많이 하다 보니 최근 힌두교 원리주의자들이 강제로 불교도를 힌두교로 '재개종'시키는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출처: 중앙일보] “개도 먹는 우물물, 왜 못먹나” 인도 힌두교 천민들 개종 붐 ​ 5]. 현대불교 2013.02.15. 우명주 박사(동국대 불교학과 강사). ​ ...이것은 단지 그 사람만의 의견이 아니라 많은 힌두교 신자들의 의견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신불교를 힌두교와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로 인식시키기 매우 힘든 것이 현실이다. ​ 그러나 한편에서는 불가촉천민을 무시하던 시선을 그대로 불교에 투영해 신불교를 천한 불가촉천민들이 믿는 천한 종교로 바라보기도 한다. 또한 불교도라는 것이 곧 불가촉천민 출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 6]. 일본은 인도와 달리 동남아 패전국.약소국들인 태국,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처럼 불교국입니다. ​ 일본 강점기로 대중언론에서 최근 유교가 도전받고 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일본 불교), 기독교의 주권이 없는 법리적 측면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 7]. 일본은 막부시대 불교국가가 되어, 성씨없는 賤民 점쇠를 새롭게 일본 천황으로 옹립하여 불교국답게 점쇠賤民.불교 Monkey점쇠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하였습니다. 점쇠賤民.불교Monkey천황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대(그 후신이 마당쇠賤民.불교 Monkey서울대)를 설립하였고, 일제 강점기의 불교전문학교(동국대), 초급대(부산대,경북대,전남대,이리농림고 후신인 전북대 농대, 서울시립대등)와 전국 각지의 공립 중고등학교를 만들어서 주권.자격.학벌없이 서울대 뒤의 카르텔이 되어 대중언론에서 발호하여왔습니다. 서울대, 연세대(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 고려대(구한말 서민출신 이용익이 만든 사설 보성전문 후신. 보성전문은 이후 동학란을 일으킨 천도교 소속이다가, 해방후 친일파 김성수가 인수하여 대학교로 변경)의 대중언론 카르텔뒤에 새로 생긴 해방후의 대학들은 주권.자격.학벌없이 그 한참뒤에서 억눌려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국사 성균관 자격가진 해방후의 성균관대에 대항해, 대중언론에서 성균관대를 오도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카르텔 및 왜구 잔재학교들은 현행헌법이나 조선.대한제국 관습으로 볼 때는 패전국 잔재로 한국영토에 남은 奴隸.賤民이며, 하느님을 부정하고 창조신에 항거하는 침팬치.Monkey류이거나 그 뒤의 奴卑.下人일 뿐입니다. 해방후에 새로생긴 대학들이나 중고등학교중 서울대가 가장 좋고 연세대.고려대가 그 다음이며 그 뒤에서 순번따지는 대학들은 대중언론.입시지의 주장을 믿고 현혹된 奴卑.下人입니다. . 헌법 임시정부가 중요함. 주권.자격.학벌없는 패전국 奴隸.賤民 서울대뒤 추종세력들이 헌법(임시정부 반영. 을사조약.한일병합 무효, 대일선전포고), 국사(성균관, 성균관대), 국제법[2차대전때 일본 항복,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 받아들여 일본의 주권은 한국영토에 없었으며, 일본 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없이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한 적국 일본의 적산재산형태였는데, 적산재산 국유화형태로 국립 서울대가 되어, 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입시계를 통하여 추종세력을 만들어 항전해옴], 세계사에 도전해옴. 교과서자격 Royal성균관대(국사 성균관자격 정통승계,한국 최고대), 서강대(세계사 반영. 국제관습법상 교황성하 윤허 적용, Royal 성균관대 다음 Royal 서강대로 예우)에 덤비는 대중언론.입시계의 도전을 막기위해 이런 개념을 적용함. ​Royal성균관대(국사 성균관 자격, 한국최고대)와 서강대(성대다음 Royal대 예우)는일류,명문끝. * 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Royal 성균관대. 세계사 교황 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 패전국 일본 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어왔음. 대중언론에서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에 침략.도전해옴.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헌법(을사조약.한일병합 무효, 대일선전포고),국제법, 교과서(국사,세계사)를 기준으로, 일제강점기 잔재를 청산해야함.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8]. 유교와 관련된 자료들. 1. 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의 24절기. 중국 24절기는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임.24절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된지는 몇해 되지 않으니,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정신적 유산인 이 24절기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발전.계승시켜야 하겠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73 2.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유교에서는 하느님(天)을 초월적 절대자로 보고 숭배해왔습니다. 공자님은 하늘이 내려보내신 성인. 성인임금(文宣帝이신 공자님 이전의 요순우탕도 성인임금이심)이시자, 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이 점이 중요합니다. 공자님의 가장 큰 업적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은주시대에 믿어온 우주만물의 지배자이시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의 초월적 존재를 많은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계승시키시고 가르치신 점입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3. 해방이후 성균관대.유교 기득권은 학교교육(국사 성균관,세계사 유교, 윤리의 유교교육, 국어.한문의 삼강오륜등)에서 나옵니다.한국에서는 성균관대가 최고(最古,最高) 대학 학벌입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국제관습법으로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 http://blog.daum.net/macmaca/2560 4.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최고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원)이 승계.한국의 Royal대는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성대 다음 국제관습법상 학벌이 높고 좋은 예우 Royal대학.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음. http://blog.daum.net/macmaca/2967 5.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 일본항복으로 이들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은 없는상태임. 일제강점기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인 한국유교를 인정않았음. http://blog.daum.net/macmaca/2632 6. 한국은 수천년 동아시아세계종교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나라.최고제사장은 고종후손 황사손(이원).5,000만이 조선성명 유교한문성씨.본관 의무등록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신도(불교),불교,기독교는 주권없음.일제강점기 유교를 종교로 불인정.해방후 교육은 유교가 주류.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이승만)연설문.우리나라 종교 유교 강조,유교 교훈지켜 예의지국 백성이 되자고 설파.아세아 동방 모든나라가 다 유교의 덕화 입었다고 하시며,유교의 교훈 지켜 예의지국 백성이 되자고 훈시.삼강오륜 중시연설. http://blog.daum.net/macmaca/2803 7. 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로, 6백년 넘는 역사를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는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Royal 성균관대. 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두 대학만 일류.명문대임. 해방후 조선성명 복구령으로, 유교국가 조선의 한문성명.본관등록이 의무인, 행정법.관습법상 유교나라 한국. 5,000만 한국인뒤 주권없는 패전국 불교 Monkey 일본의 성씨없는 점쇠 僧(일본에서는 천황). 그뒤 한국에 주권.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점쇠가 세운 마당쇠 僧대학). 그 뒤 서울대에 대중언론에서 눌려온 새로생긴 일제강점기 초급대 출신대나 기타의 비신분제 대학들.@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그러나 세계사로 보면, 가톨릭이라는 세계종교는 너무 세계인에 일반화되어서, 국사적개념과 병립하여, 세계사적 개념으로,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인 한국에서, 국제관습법상 세계종교 가톨릭의 자격으로 예우하는게 적절함. 일본식 개념으로, 일본 국지신앙인 일본 신도(일본의 국교), 불교, 기독교의 위상을, 한국에 적용할수는 없음. 그리고 한국과 바티칸시티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기 때문에, 한국헌법 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하고,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인 일본의 종교기준을 적용하는게 맞지않음. 불교는 인도에서도 배척당해왔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라, 불교국 일본의 종교기준대로 하면, 세계종교 유교도 종교아닌 사회규범이 되어, 일본 신도(불교에서 파생됨), 불교, 기독교만 포교종교고, 유교는 일제강점기의 신생종교인 원불교보다 신자수가 적은 50만(성균관.향교의 제사인구만 유교도라고 1980년대 초반에 통계청 표본조사를 실시하여, 다시 유교에 도전하고 있음)이 되어, 해방한국의 종교주권을 침해당하게 됨. 그래서,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 가톨릭의 교과서.학술적 자격이 있는 세계사와 한국사, 국민윤리(유교나 기독교등의 세계종교를 교육)등의 종교자격을 적용할 수 밖에 없음. 근대 세계의 지배세력이던 서유럽의 학자들의 이론으로 이루어진 학교교육의 모든 교과목들임. 중국(황하문명, 세계 4대발명품인 종이,화약,나침판, 인쇄술의 중국 발명품이 세계사의 세계 4대 발명품임)이나 유교, 중국의 대학제도(한나라 태학, 위나라 태학, 이후의 수.당송의 국자감, 원.명.청의 국자감, 원.명.청의 국자감에 계승된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는 분명 세계사의 가장 큰 혜택을 보아온 세계적 자격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 8. 하느님에 대드는 불교일본의 성씨없는 점쇠賤民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고 예수보다 높다고 자기들이 들여온 기독교의 신부억압과, 목사 고문.구타. http://blog.daum.net/macmaca/3044 9. 한국인은 행정법.관습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179 10.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11. 한국은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나라.불교는 한국 전통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후발 국지적 신앙인 일본신도(새로 만든 일본 불교의 하나).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일본항복으로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 없음.부처는 브라만교에 대항해 창조주를 밑에 두는 무신론적 Monkey임.일본은 막부시대 불교국이되어 새로생긴 성씨없는 마당쇠 천민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불교 Monkey나라.일본 신도는 천황이 하느님보다높다고 주장하는 신생 불교 Monkey임.한국은 헌법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장되어, 일본에 선전포고한 상태가 지속되는 나라임.생경하고 급격하게 새로 생긴 마당쇠 천민 천황이 세운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에 남겨진 패전국 일제 잔재며, 마당쇠 천민 학교며, 부처 Monkey.일본 Monkey를 벗어날 수 없는 불교.일본Monkey 천민학교로,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되는 대상임. 한국 영토에 주권이나 학벌같은건 없이 대중언론에서 덤비며 항거하는 일제 잔재에 불과함.한국은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에 유교의 본관과 성씨를 등록하는 행정법상 유교국가이고, 설날.추석등 유교 명절 쇠는 유교국가임.http://blog.daum.net/macmaca/2632 12. 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부처의 불교는 원래 창조주인 범천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사상인데, 고대에 여러 나라들에 왕성한 포교를해서 널리 퍼졌지만, 중국이나 한국같은 전통 유교국에서는 핍박을받아왔고, 승려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해왔으며,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았고, 유교에 빌붙어서 유교의 하부 사상으로 유교적 풍토에 적응해 온 외래 포교종교임. 미국은 적어도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데, 창조주보다 높다는 부처원숭이 불교국가가 된 일본. 막부시대 이후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여 기독교에 대항한 이후, 불교 원숭이 국가가 된 일본. 불교에 기반한 일본 신도는 원숭이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예수보다 높다고, 한국 강점기때 기독교를 탄압함. 그리고 국지적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로 세계종교 유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 및 전세계 화교)의 일원이던 조선.대한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 정도로 오도하다가 패전국이 됨. http://blog.daum.net/macmaca/2596 13. 한국에서는 Royal대인 성균관대가 최고(最古,最高) 대학 학벌. 세계사를 반영시 관습법적으로 교황 윤허 Royal 서강대도 성대 다음 Royal대로 두 대학이 가장 학벌이 높고 좋음. 서울대는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같은 건 없음. 단지 마음대로 등록하던 여러 신문에 남아있던, 친일부왜배들이 성균관대에 도전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인 나라에서 일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주권없고 학벌없는 대학임은 변치 않음. http://blog.daum.net/macmaca/2260 14. 유교의 내세관(來世觀)과 기복신앙(祈福信仰) 측면에 대한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800 15. 유교국가의 전통적 특징중 하나는 호적(戶籍)제도였음. 한국과 중국의 호적제도에 관하여! http://blog.daum.net/macmaca/2492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대나 한국 유교전통의 해방후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 현재에도 이어지는 행태등(수천년 유교문화 전통이라, 국가나 집권정부 차원에서 제재하지 않는한 끊임없이 이어지는게 전통문화들임)에 대해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說)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마지막 첨부자료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https://www.blogger.com/blog/post/edit/751419199967682733/90555901185768022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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