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8일 토요일
2025년 3월 9일(음력 2월 10일)은 춘기석전(春期釋奠:先聖,文宣王의 칭호를 가지신 공자님에 대한 음력 2월 제사)의 날입니다. 孔子 誕辰 2576年 成均館 春期 釋奠은 오전 10시부터 거행됩니다.
2025년 3월 9일(음력 2월 10일)은 춘기석전(春期釋奠:先聖,文宣王의 칭호를 가지신 공자님에 대한 음력 2월 제사)의 날입니다. 孔子 誕辰 2576年 成均館 春期 釋奠은 오전 10시부터 거행됩니다.
孔子 誕辰 2576年 成均館 春期 釋奠
일시 : 2025년 3월 9일 오전 10시
장소 : 성균관 비천당
주최 : 성균관
주관 : (사)국가무형문화재 석전대제보존회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국가유산청, 성균관대학교
* 출처: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 釋奠保存會.釋奠敎育院
[1]. 봉행순서(奉行順序)
석전은 전통적으로 나라에서 주관하던 의식의 하나로 옛날부터 학교에서 선성과 선사들께 드리던 제사의식이며, 유교의 집대성자 만세종사(萬世宗師)이신 공부자(孔夫子)를 비롯한 유교의 성인(聖人)과 현인(賢人)들을 추모하고 그 분들의 위대한 덕을 기리기 위한 행사이다.
중국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B.C.551)에 탄생하신 공부자께서는 인간 사랑의 정신인 인(仁)의 실천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셨고, 인간의 고귀함을 일깨우셨으며, 예의(禮義)의 회복을 통한 도덕적 이상세계의 건설을 위해 헌신하셨다.
공부자와 유교정신을 계승•발전시킨 공부자의 제자 등 성현들의 은덕에 감사하고 경모하며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유교와 유교 사상의 발전을 위해 더욱 헌신하겠다는 다짐으로 매년 봄, 가을에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개 향교(鄕校)에서 동시에 석전(釋奠)이 봉행된다. 현재 문묘(文廟)에는 공부자를 비롯한 다섯 분의 성인과 우리나라의 현인 18(位), 그리고 중국의 현인 16위(位) 등 모두 39위(位)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 석전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최초의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이 설립될 때 석전도 함께 봉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국학(國學)에 문묘를 모셔놓고 석전을 봉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국립대학이던 성균관(成均館)에 문묘를 세우고 더욱 큰 규모로 확대하여 국가적인 행사로 석전을 봉행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역사적으로 뿌리를 같이하는 태학이나 국학, 성균관은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한민족의 정통대학으로 유교를 교육이념으로 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온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석전은 유교의 발생지인 중국에서도 이미 그 원형을 상실하여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그 원형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영신례 迎神禮
문묘제례의 첫 번째 순서는 영신의 예절이다. 영신례는 참례자(參禮者)들이 추모(追慕)할 분들을 맞이해서 참신 배례(參神拜禮)하는 절차이다.
영신례는 알자(謁者)가 유사근구청행사(有司謹具請行事)를 창(唱)한 다음에, 헌관 이하 재위자(在位者) 모두 사배(四拜)하는 과정이다.
이때 헌가(軒架)에서 응안지악(凝安之樂) 황종궁(黃鐘宮) 음악을 연주하고 열문지무(烈文之舞) 문무(文舞)를 춘다.
전폐례 奠幣禮
초헌관(初獻官)이 신위 앞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폐비를 올리는 절차이다.
창홀에 따라 초헌관은 알자(謁者)의 인도를 받아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을 씻는다.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한 후 꿇어앉는다. 이때 등가(登歌)에서는 명안지악(明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는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춘다.
초헌관이 세 번 향(香)을 피우고, 대축(大祝)은 폐비(幣篚)를 가져다 초헌관에 드린다.
초헌관은 폐비를 받아 헌폐(獻幣)하고 대축에게 주면 대축은 폐비를 신위 앞에 올린다.
초헌관은 알자의 인도를 받아 복성공(復聖公:顔子) 신위 앞에 나아가 세 번 향을 피운다. 대축은 폐비를 가져다. 초헌관에게 드린다.
초헌관이 폐비를 받아 헌폐하고 대축에게 주면 대축은 폐비를 신위 앞에 올린다.
종성공(宗聖公:曾子), 술성공(述聖公:子思子), 아성공(亞聖公:孟子) 순으로 나아가 세번 향을 피우고 헌폐(獻幣)하여 폐비를 각 신위 앞에 올린다.
초헌례 初獻禮
초헌관(初獻官)이 공자를 비롯한 5성위에 작(爵, 잔)을 올리고, 대축이 축문을 읽는다.
초헌관이 알자(謁者)의 인도를 받아 대성지성문선왕 준소(尊所)에 나아가 서향해 선다. 이때 등가(登歌)에서는 성안지악(成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佾舞)는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춘다.
사준(司尊)이 멱(冪)을 들고 예제(醴齊)를 작(爵)에 뜨고 봉작에게 주면 봉작은 그 작을 받든다.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대성지성문선왕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해 꿇어앉는다. 봉작(奉爵)이 초헌관에게 작을 드리면 초헌관이 작을 받아 헌작(獻爵)한다. 초헌관이 작을 전작(奠爵)에게 주면 전작은 작을 신위 앞에 올린다.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배위(配位) 준소에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서면, 사준은 멱을 들고 예제를 작에 뜨고 봉작에게 준다.
초헌관은 알자의 인도를 받아 복성공(復聖公)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앉는다. 봉작(奉爵)이 초헌관에게 작을 드리면 초헌관이 작을 받아 헌작(獻爵)한다. 초헌관이 작을 전작(奠爵)에게 주면 전작은 작을 신위 앞에 올린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종성공(宗聖公), 술성공(述聖公), 아성공(亞聖公) 신위 앞에 차례대로 헌작한다. 헌작이 끝나면 음악을 그치고 휘(麾)를 눕힌다.
초헌관은 알자의 인도를 받아 대성지성문선왕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어앉는다. 대축은 찬인의 인도를 받아 초헌관 왼쪽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꿇어 앉아 축문을 읽는다. 이때 참례자 모두 부복한다.
축문을 다 읽었으면 초헌관과 대축은 알자와 찬인의 인도를 받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일무(佾舞)는 문무(文舞)가 물러나고 무무(武舞)가 나온다. 헌가(軒架)는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한다.
아헌례 亞獻禮
아헌관이 공자를 비롯한 5성위에 작(爵, 잔)을 올린다.
아헌관(亞獻官)이 알자(謁者)의 인도를 받아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을 씻는다.
아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대성지성문선왕 준소(尊所)에 나아가 서향해 선다. 이때 헌가(軒架)에서는 성안지악(成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佾舞)는 소무지무(韶武之舞) 를 춘다.
사준(司尊)이 멱(冪)을 들고 앙제(盎齊)를 작(爵)에 뜨고 봉작 에게 주면 봉작은 그 작을 받든다.
아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대성지성문선왕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해 꿇어앉는다. 봉작(奉爵)이 아헌관에게 작을 드리면 아헌관이 작을 받아 헌작(獻爵)한다. 아헌관이 작을 전작(奠爵)에게 주면 전작은 작을 신위 앞에 올린다.
아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배위(配位) 준소에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서면, 사준은 멱을 들고 앙제를 작에 뜨고 봉작에게 준다.
아헌관은 알자의 인도를 받아 복성공(復聖公)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앉는다. 봉작(奉爵)이 아헌관에게 작을 드리면 아헌관이 작을 받아 헌작(獻爵)한다. 아헌관이 작을 전작(奠爵)에게 주면 전작은 작을 신위 앞에 올린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종성공(宗聖公), 술성공(述聖公), 아성공(亞聖公) 신위 앞에 차례대로 헌작 한다. 아헌관은 알자의 인도를 받아 정해진 자리로 돌아온다.
종헌례 終獻禮
종헌관(終獻官)이 공자를 비롯한 5성위에 작(爵, 잔)을 올린다.
종헌관이 알자(謁者)의 인도를 받아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을 씻는다.
종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대성지성문선왕 준소 (尊所)에 나아가 서향해 선다. 이때 헌가(軒架)에서는 성안지악(成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佾舞)는 소무지무(韶武之舞)를 춘다.
사준(司尊)이 멱(冪)을 들고 청주(淸酒)를 작(爵)에 뜨고 봉작에게 주면 봉작은 그 작을 받든다.
종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대성지성문선왕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해 꿇어앉는다. 봉작(奉爵)이 종헌관에게 작을 드리면 종헌관이 작을 받아 헌작(獻爵)한다. 종헌관이 작을 전작(奠爵)에게 주면 전작은 작을 신위 앞에 올린다.
종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배위(配位) 준소에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서면, 사준은 멱을 들고 청주를 작에 뜨고 봉작에게 준다.
종헌관은 알자의 인도를 받아 복성공(復聖公)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앉는다. 봉작(奉爵)이 종헌관 에게 작을 드리면 종헌관이 작을 받아 헌작(獻爵)한다. 종헌관이 작을 전작(奠爵)에게 주면 전작은 작을 신위 앞에 올린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종성공(宗聖公), 술성공(述聖公), 아성공(亞聖公) 신위 앞에 차례대로 헌작한다. 종헌관은 알자의 인도를 받아 정해진 자리로 돌아온다.
분헌례 分獻禮
분헌관(終獻官)이 종향위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작(爵, 잔)을 올린다.
종헌례와 동시에 봉행한다.
분헌관은 찬인의 인도를 받아 관세위에 나아가 손을 씻은 후 각 종향위(從享位)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앉는다.
분헌관이 세 번 향을 피운다. 사준(司尊)이 멱(冪)을 들고 청주(淸酒)를 작(爵)에 뜨고 봉작 에게 준다. 봉작은 작을 받들어 분헌관에게 드리면 분헌관이 작을 받아 헌작( 獻爵)한다. 분헌관이 작을 전작(奠爵)에게 주면 전작은 작을 신위 앞에 올린다. 분헌관은 각 종향위 신위 앞에 헌작한다. 헌작이 끝나면 분헌관은 찬인의 인도를 받아 정해진 자리로 돌아온다.
음복수조례 飮福受胙禮
초헌관이 제주와 음식을 맛본다.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음복위(飮福位)에 나아가 서향하여 꿇어앉는다. 대축은 음복위에 나아가 헌관의 왼쪽 에서 북향하여 꿇어앉는다.
대축이 복주(福酒)를 헌관에게 드린다. 초헌관이 복주를 다 마시면 대축은 작을 받아 자리에 내려놓는다.
대축이 조육(俎肉)을 초헌관에게 드리면 초헌관은 조육 (俎肉)을 받아 집사에게 준다. 집사가 조육을 받아 동쪽 계단으로 내려간다.
초헌관과 대축은 알자와 찬인의 인도를 받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헌관 이하 참가자 모두 4번 절을 한다.
철변두 徹籩豆
대축이 변(籩)과 두(豆)를 거둔다.
등가에서 오안지악(娛安之樂)을 연주한다.
대축이 찬인의 인도를 받아 변(籩)과 두(豆)를 거둔다.
송신례(送神禮)
참례자(參禮者)들의 성현(聖賢)들을 전송(餞送)하는 의식인 송신의 예절이다
제관(祭官)들과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절을 네 번 하면서 성현(聖賢)들을 배웅한다.
헌가에서 응안지악(凝安之樂) 송신 황종궁(送神黃鐘宮)을 연주한다.
망예례 望瘞禮
망예례
초헌관이 망예위에 나아가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고 땅에 묻는다.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를 받아 망예위(望瘞位)에 나아가 북향하여 선다. 대축이 찬인의 인도를 받아 축문(祝文)과 폐백(幣帛)을 대광주리에 담아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 구덩이 앞에 놓는다.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고 흙을 반쯤 덮으면, 초헌관과 대축은 알자와 찬인의 인도를 받아 제자리로 돌아 간다. 알자는 헌관의 왼쪽에서 예필(禮畢)을 고한다.
헌관은 알자와 찬인의 인도를 받아 나간다. 대축과 여러 집사들은 찬인의 인도를 받아 배위(拜位)로 나아가 4번 절을 한 후 나간다. 전사관(典祀官)은 묘사(廟司)를 인솔하여 예찬(禮饌)을 거두고 독(櫝)을 덮고 소촉(消燭)한 후 문짝을 닫는다.
* 출처: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 釋奠保存會.釋奠敎育院
* 필자註 1):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 성균관대는, 해방후, 미군정이 공자묘경학원을 성균관으로 개칭(성균관 복구에 해당)하는 법률을 발효, 전국 유림대회 결의(고문:이승만,김구, 위원장: 김창숙)에 따라, 성균관장으로 선출된 김창숙 선생이, 미군정에, 대학기구로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의 환원(복구)을 실행하는 성균관대를 등록(성균관은 제사기구로 이원화)하여,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승계대학으로, 미군정때부터의 국사 성균관 교육으로, 해마다, 학교에서 성균관을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해방이후, 미군정부터, 최고대학 교육기능은 성균관대로, 유교의 여러 부분집합 중 하나인 문묘(文廟)제사(祭祀)의 춘기(春期).추기(秋期) 석전(釋奠)은 성균관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2]. 유교경전인 예기에 나타나는 춘기석전.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나타나는 춘기석전.
天子乃鮮羔開冰 先薦寢廟 上丁命樂正 習舞釋菜
天子乃帥三公九卿 諸侯大夫 親往視之 仲丁又命樂正入學習樂
천자는 어린양을 신에게 드리고, 얼음을 꺼내고 나서 먼저 종묘(宗廟)에 바친후에 신하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상순의 정일(丁日일)에 악정에게 명하여 제생(諸生)이 문.무(文武)의 춤을 익히고 석채(釋菜)의 예를 행하게 한다. 천자는 3공.9경.제후.대부를 이끌고 가서 이를본다. 중순의 정일에 또 악정에게 명하여 대학에 들어가서 제생에게 음악을 익히게 한다.
. 상정(上丁) 상순의 정일(丁日).
. 석채(釋菜) 채는 나물의 뜻. 미나리.마름 등속을 제물로 바치고, 선사(先師)를 제사지내는 것
. 중정(仲丁) 중순의 정일(丁日)
* 필자註 2). 위 본문에서 上丁이 음력 2월의 상정일에 선사[先師:원래는 공자님에 대한 호칭이었는데, 先師이시던 공자님께서 나중에 유일한 선성(先聖)으로 추증되심]께 제사지내는 날임. 석채(釋菜)는 선사에 제사지내는 것.
.* 출처: 신역(新譯) 예기(禮記), 역해자(譯解者):권오돈, 발행처:홍신문화사, 2003.10.30
[3]. 백과사전류에 설명된 석전( 釋奠)
1].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석전
[ 釋奠 ]
석전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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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에서 열렸던 석전제 전경. 요즘도 성균관 문묘에서는 옛 의식대로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씩 공자를 비롯, 4성 10철 72현을 제사지내는 의식인 석전이 거행되고 있다.
유형
의식행사
성격
제사, 추모의식
행사시기
봄 2월(음력)과 가을 8월(음력)의 상정일(上丁日)
행사장소
성균관, 지방 향교
목차
정의연원 및 변천내용
정의
전통 사회에서 산천(山川)·묘사(廟社)에 올리던 제사, 또는 학교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를 추모하기 위하여 올리던 의식.
연원 및 변천
석전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주례』·『예기』 등 유교 경전에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석전은 산천에 베풀기도 하고 혹은 묘사에 베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학교에서 올리기도 했으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의 의식만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산천·묘사에는 이밖에도 여러 제향(祭享)이 있는 반면에 학교에서는 오직 석전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석(釋)은 ‘놓다(舍也)’·‘두다(置也)’의 뜻이고, 전(奠)은 ‘그치다(停也)’의 뜻으로서, ‘제물을 올릴(薦饌)’ 따름이고 ‘시동을 맞이하는(迎尸)’ 등의 제사 절차는 갖추어 베풀지 않았다.
일설에는 소[牛]·양(羊) 등 고기를 제물로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고, 오직 나물[菜: 빈조류(蘋藻類)]만 드릴 뿐 일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의식을 석채(釋菜)라 한다. 석채는 또 석채(釋采)라고도 쓰는데 이는 선사에게 채백(采帛)을 올려 폐백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석전은 석채·석전(舍奠)·정제(丁祭)·상정제(上丁祭) 등의 일컬음이 있다. 정제니 상정제니 하는 것은 석전을 봄 2월(음력), 가을 8월(음력)의 상정일(上丁日: 첫 丁日)에 모시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상대(上代)에 이미 산천·묘사에서 석전을 올렸으며[『주례(周禮)』, 「춘관(春宮)」], 때로는 출정하여 죄 있는 자를 잡아오면 학교에서 석전을 베풀어 선사에게 아뢰기도 하였다[『예기(禮記)』, 「왕제(王制)」]. 전자를 정기적(常時)인 석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부정기적(非時)인 석전이다.
학교에서는 봄에 시(詩)·서(書)·예(禮)·악(樂)을 가르치는 교관(敎官)이 선사에게 석전을 올렸고 가을과 겨울에도 마찬가지라고 『예기』 「문왕세자」편에 기록되어 있다. 선사란 앞서 간 전대(前代)의 훌륭했던 스승들을 일컫는 말이고, 여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봄에 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대(周代)에는 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을 선성(先聖)으로 모시는 것이 고대 중국의 관례였다. 한(漢)나라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들게 되자 공자를 점차 선성·선사의 자리로 올려 문묘의 주향(主享)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우러러 모시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같은 제왕은 주공(周公)을 선성, 공자를 선사로 삼아 공자의 고택을 찾아 가서 석전을 올리기도 하였다. 위(魏)·수(隋)·당(唐)나라 이후로는 대체로 공자를 선성, 안회(顔回)를 선사로 받들어 석전을 올렸다. 명(明)나라에 와서 태학(太學)의 문묘를 대성전(大成殿)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로 확립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太學: 국립중앙대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석전도 봉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태학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학에서 석전의 의식을 봉행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648년(진덕여왕 2)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682년(신문왕 2)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717년(성덕왕 16)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10철(十哲: 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10명) 및 72제자의 화상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국학[국자감(國子監) 또는 성균관(成均館)으로 고쳐 불렀다]에 문묘[선성묘(先聖廟) 또는 문선왕묘(文宣王廟)라고도 일컬었다]를 모셔 놓고 석전을 올렸고 왕이 직접 헌작(獻酌)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398년(태조 7)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을 설치하여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하였으며, 정전(正殿)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四聖)·10철과 송조6현(宋朝六賢) 등 21위를 봉안하고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우리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儒賢) 94위 등 모두 112위를 봉안하고서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석전을 올렸다. 지방에는 고을마다 모두 330여의 향교가 있어 중앙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매년 두 차례씩 석전을 올렸다.
지금도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남한에 있는 231개소)에서는 해마다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의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1949년 전국 유림대회 결정으로 과거 동무·서무에 봉안하였던 112위 중 우리나라 명현 18위는 대성전에 종향하고 중국 유현 94위의 위패는 매안(埋安)하였다.
내용
집례 및 묘사(廟司)가 먼저 섬돌 아래에서 4배(拜)를 올린 뒤 손을 씻고 자기 위치에 선다.
① 창홀(唱笏):집례가 홀기를 부르기 시작한다. 전악(典樂)이 악사(樂士)와 무생(舞生)을 인솔하여 정해진 위치로 입장하면, 찬인이 대축(大祝)과 모든 집사(執事)를 인도하여 섬돌 아래서 4배하도록 한다. 대축과 모든 집사가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을 씻고 각각 자기 위치로 가서 선다.
묘사 및 봉향(奉香)·봉로(奉爐)가 대성전으로 올라 문을 열고 개독(開櫝)한다. 알자와 찬인이 초헌관(初獻官)·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분헌관(分獻官)을 인도하여 정해진 위치로 나아간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행사의 시작을 청하고 당하악(堂下樂)이 연주되고 문무(文舞)가 시작되면 헌관과 참례자 일동이 4배한다.
② 전폐례(奠幣禮):폐백을 드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안자 신위, 증자 신위, 자사자 신위, 맹자 신위 순으로 세 번 분향하고 폐백을 드린 뒤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이때 당상악(堂上樂)을 연주하고 문무를 춘다.
③ 초헌례(初獻禮):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앞으로 가면 당상악과 문무가 시작된다. 공자 신위에 술잔을 올리고 조금 물러서서 꿇어앉으면 대축이 축문을 읽는다. 초헌관은 안자·증자·자사자·맹자 신위 순으로 각각 술잔을 올리고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④ 아헌례(亞獻禮):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예로, 아헌관이 공자·안자·증자·자사자·맹자 순으로 술잔을 올린다. 당하악과 무무(武舞)가 연주된다.
⑤ 종헌례(終獻禮):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예로, 종헌관이 앞의 순서대로 술잔을 올린다. 당하악과 무무를 춘다.
⑥ 분헌례(分獻禮):앞서 술잔을 올린 공자와 네 신위 이외에 종향(從享)되어 있는 사람에게 술잔을 드리는 예이다. 동종향분헌관(東從享分獻官)과 서종향분헌관(西從享分獻官)이 찬인의 인도를 받아 동종향 17위, 서종향 17위에 술잔을 올린다.
⑦ 음복례(飮福禮):제사에 쓴 술과 음식을 먹는 예이다.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로 음복하는 곳으로 나아가 술과 포를 음복한다. 대축이 철상(徹床)을 한다. 당상악을 그치고 당하악을 연주한다.
⑧ 망료례(望燎禮):제사가 끝나서 축문을 불사르는 것을 지켜보는 예이다.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축문 사르는 곳으로 나아가면 대축이 폐백과 축문을 불사른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예가 끝났음을 아뢰고 알자와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물러감으로써 행사가 모두 끝난다.
* 출처:석전 [釋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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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산백과
석전
[ 釋奠 ]
요약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文宣王)를 비롯한 4성(四聖) 10철(十哲) 72현(七十二賢)을 제사지내는 의식.
춘기석전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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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기석전봉행
석전제·석채(釋菜)·상정제(上丁祭)·정제(丁祭)라고도 한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첫째 丁日)에 거행한다.
석전이라는 이름은 '채(菜)를 놓고(釋), 폐(幣)를 올린다(奠)'에서 유래한다. 처음에는 간략하게 채소만 놓고 지냈으나 뒤에는 고기·과일 등 풍성한 제물을 마련하여 지냈다.
중국의 상대(上代)에는 선성(先聖)·선사(先師)의 제사로 발전하여 주공(周公)을 제사하다가 한(漢)나라 이후 유교가 중요시되자 공자를 제사하게 되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재위 57∼75)는 공자의 옛 집까지 가서 공자와 72제자를 제사한 기록이 있으며, 당(唐)나라에서는 628년 공자를 선성(先聖), 안회(顔回)를 선사(先師)라 해서 제사를 지냈다. 739년에는 공자에게 문선왕(文宣王)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명(明)나라 초기에는 대학에 묘(廟)를 설치하고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였다.
한국에서는 유교가 전래된 후, 신라에서 공자와 10철 72제파의 화상을 당나라에서 가져와 국학(國學:大學)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에서도 국자감(國子監:成均館)에 문선왕묘(문묘)를 세워 석전제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성균관에 문묘를 설치하고 여기에 한국의 18현을 합한 112위(位)를 봉안하여 석전제를 지냈는데, 이를 위하여 성균관에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를 지급하였으며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석전제를 주관하였다. 지금도 성균관에서는 옛 의식대로 해마다 봄과 가을, 2차례씩 석전을 거행한다.
* 출처: 석전 [釋奠]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4]. 공자님이 하느님(天)과 연계되심을 나타내는 내용들. 유교 경전 시경, 논어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1]. 시경(詩經)에 나오는 하느님의 인간창조.
하늘이 만백성을 낳으시니(天生蒸民).
* 출처: 詩經 大雅 蒸民.
* 필자註 3). 공자님은 직접 지으시지 않은 이전부터의 시에 대해 편찬작업을 거치시며, 공자님에게 부여되신 천명(天命)에 의해 시경(詩經)에 천생증민(天生蒸民, 하늘이 만백성을 낳으심)이라는 시를 넣으시고, 하느님(天)의 우주주재 사실을 후세 사람들에게 계승시키신 하느님이 보내신 성자이십니다. 많은 시가 빠져있지만, 예의를 가르칠 수 있는것을 취하시면서 공자님이 편찬한 시경(詩經)입니다.
2].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려주셨으니, 환퇴인들 감히 나를 어찌하랴?"(子曰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 출처: 논어 述而.
* 필자註 4). 은주시대의 상제(上帝).하느님(天)숭배시대를 이어받으셔서, 춘추전국시대에도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던(특혜받은 은나라 왕족의 후예) 계급출신답게 남들은 말하기 어려운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德을 내비치시는 모습입니다.
3].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나는 누구를 속일까? 하늘을 속일까? 吾誰欺 欺天乎.
. 출처: 논어 子罕.
공자께서 병이 깊으셨다. 자로가 제자들을 가신(家臣)의 예법으로 시종케 하였다. 병환이 차도가 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래였구나, 由(자로)의 속임이여! 가신이 없음에도 가신을 만들었다면 나는 누구를 속일까? 하늘을 속이랴?. 子疾病, 子路使門人爲臣. 病間, 曰: 久矣哉. 由之行詐也. 無臣而爲有臣, 吾誰欺. 欺天乎.
* 필자註 5). 균천(鈞天)의 선택으로 태어나신 성자답게 최고신이신 하느님(天)의 주재하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하느님을 속일 수 없는 성스러운 특수한 운명을 표출하고 계십니다.
4].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 아아! 하늘(하느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顔淵死 子曰 天喪予 天喪予.
* 출처: 논어 先進.
* 필자註 6). 얼마나 아끼시고 충격받으셨으면, 통곡하시겠습니까? 인간의 죽음은 결코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공자님이 막을 수 없는 안연의 죽음을 이렇게 슬퍼하시며 하느님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공자님 처지를 비유하신것으로 판단됩니다. 안연이란 제자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비통해 하신 점은 평소의 공자님의 언행에서 드러납니다. 논어 공야장에 공자님과 자공이 안회같지 못하다고 안회를 아끼시는 스승의 관점이 나옵니다.
5].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공자가 자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와 안회는 누가 더 나으냐?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 어찌 감히 안회를 바라보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같지 않다. 나와 너는 그만 같지 못하다."
子 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
對曰 賜也 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 弗如也. .
* 출처: 논어 公冶長.
6].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사람도 탓하지 않는다. 아래로부터 배워 위에 통달한다. 나를 알아주는분은 하늘뿐이리라.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 출처: 논어 憲問.
* 필자註 7). 나를 알아주는분은 하늘뿐이리라(知我者其天乎). 하느님이 내려보내신 성자인 공자님의 처지가 그 당시에는 만사형통이 아니고 갖은 고난을 겪는 과정도 있었기 때문에, 속세에서 인정받지 못하시는 상황이 많아도, 하느님(鈞天)만은 공자님의 성스러운 활동을 유일하게 지켜보시는 의식을 가지고 계신것이라 판단합니다.
. 왕손가가 물었다.안방 신주에 아첨함보다 차라리 부엌신을 모셔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소. 하늘에 죄를 지으면 기도할곳이 없는 법이오.
王孫賈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
* 출처: 논어 팔일(八佾).
* 필자註 8).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
왕손가는 위나라 영공의 중신으로 군사권을 장악한 실력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공자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할 의사가 있음을 눈치채고 공자님에게 넌지시 암시를 주었다 합니다. 안방신주에 아첨하느니보다, 부엌신에 아첨하라고 한말은 무엇입니까? 즉 안방신주에 해당하는 영공에 아첨하느니 실력자인 자기에게 아첨하라고 암시한 것입니다.
이에 공자님은 하늘에 죄를 지으면 안방신주고, 부엌신이고 기도를 올릴 자리가 없어진다고 답하셨습니다. 즉 우주만물의 최고 지배자이신 하느님(天)이 여러 神중에서, 가장 높듯이, 지상의 현실 세상에서는 임금이 가장 높으므로, 天理를 따르듯이, 지상에서는 임금의 권위가 가장 높음을 은연중에 내비치신 것입니다.
7] 공자님의 知天命.
공자는 만년에 〈위정편(爲政篇)〉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六十而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 출처: 지천명 [知天命] (두산백과).
유교에서는 최고 하느님이신 균천(鈞天)께서 유일하게 선택하신 성자이신 공자님께서 나이 50에 천명[天命, 하늘의 명령]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주재하시는 하느님(天)의 명령이나 원리를 깨우치신, 선택받으신 공자님께서 이 세상에 전파하신 천명, 인의예지신, 삼강오륜(공맹의 가르침에서 후세 유가들이 더욱 구체화시킴)등은 이후 동아시아 유교사회에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보내신 유일한 성자이신 공자님의 天命은 이후 맹자(孟子) 이루(離婁) 上편에서 교만해진 피조물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하늘을 따르는 사람은 존재하고, 하늘을 거스르는 사람은 망한다(順天者存, 逆天者亡).
8]. 하느님(天)께서 유일하게 선택하신 성자이신 공자님에 대해서도 하느님(天)은 굳이 구체적으로 일상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나이 50에 천명을 아셨다고 밝히게 하시고(知天命), 공자님에게 덕(德)을 부여하신 점만 밝히게 하시고, 모든것을 공자님의 재량에 맡기셨습니다. 공자님께서는 하늘은 말이 없다고 경험하셨습니다. 이 말은 공자님의 일상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시고 공자님의 깨우침에 모든걸 맡기신 것입니다. 유일하게 선택하신 성자이신 공자님께서 가르치시는 만큼의 사회가 하느님의 天命이셨던 것입니다. 더 그럴듯하다고, 후세에 여러 主義者들이 나와서 공자님의 가르침을 변형시켜 유교에서 독립해 세(勢)를 얻어 집단을 형성해도 그 주장은 하느님(天)과 공자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유교경전과 유교교육기관(성균관대)의 정통성을 기본으로 하여야 인정됩니다.
인간에게 직접 개입하지 않는 하느님(天)의 우주만물 지배방식에 대해, 하느님(天)이 유일하게 성자로 내려보내신 공자님은 이렇게 하느님(天)의 섭리를 전하셨습니다. 50에 천명(天命)을 아셨다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또한 하느님이 공자님에게 부여하신 덕(德)을 분명히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방식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천(天, 하느님)은 인간에게 말은 없으시지만, 하느님(天)이 공자님에게 부여하신 덕(德)은 공자님 스스로 명확하게 주장하시며, 만물을 낳고 기르는 주재자인 천(天, 하느님)이 갖고 있는 작용력을 지천명(知天命)과 덕(德)에서 확실히 밝히신 것입니다. 유교경전 시경은 분명하게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天生蒸民)하신 하늘의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공자님이전에 정해진 천생증민(天生蒸民)의 시경말씀, 공자님의 지천명(知天命), 하늘이 나에게 덕을 부여하셨다는 공자님의 주장(天生德於予)들은 말없이 우주만물을 주재하시지만, 체험하면서 천명(天命)을 느끼게 하여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느님(天)의 방식입니다.
다음은 말없이 우주만물을 주재하는 하느님(天)에 대한 공자님의 가르침입니다.
- 다 음 -
공자께서 "나는 말을 아니하고자 하노라". 자공이 "선생님께서 말씀을 아니하시면 저희들은 무엇으로 말하고 전하겠습니까?". 이에 공자께서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가 바뀌고, 백물(百物,만물)이 자라지만, 하늘이 무슨말을 하더냐?'.
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 출처: 논어 陽貨.
* 필자註 9). 하느님(天)께서 유일하게 선택하시어 내려보내신 성자이신 공자님께서는 말을 통하여 배우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없는 섭리를, 체험하는것이 중요하다는 공자님 자신의 숭고한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신것입니다. 그 자신은 하느님에게 선택받으신 분이시지만, 말없는 하느님의 섭리를 굳이 말로 가르치려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체험하고 느끼면서, 시경(詩經)의 천생증민(天生蒸民), 공자님의 지천명(知天命), 공자님에게 부여되신 덕(德)을 우리 동아시아 인들은 유교교육으로 배워왔습니다.
9]. 습관이나 체험의 중요성에 대해 공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천성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으로 멀어진다.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 출처: 논어 陽貨.
. 필자註 10). 하느님께서는 만백성을 창조하시고(天生蒸民), 다듬어지지 않은 인간만의 여러가지 천성을 부여하셨는데, 이후 공자님을 성자로 내려보내시고, 공자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통하여, 학습하고 체험하여 하느님이 부여하신 천성을 계발하도록 공자님을 통하여 말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공자님은 합리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에서 학습과 체험으로 깨닫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天)의 섭리전달은 이미 공자님을 통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에, 공자님을 통하여 하느님(天)의 섭리를 배우고 순응해야지, 하늘을 거역하거나 공자님의 가르침에 거역하여, 창조신을 부정하는 부처 Monkey나, 하느님보다 높다는 불교계열 일본 천황 침팬치류의 주장에 익숙해진다면,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침팬치류의 경험을 쌓게 됩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이 내려보내신 공자님을 부정하는 Monkey로 살아가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하느님(天)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기품을 멀리하고, 부처 Monkey처럼 살게 됩니다.
유교의 최고 하느님이신 천(天, 하느님, 태극과 연계)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영장 인간에게 베푸시려 한 하느님의 기품은 유일하게 선택하신 공자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공자님의 제자들, 맹자, 후세의 중국 황제, 제후, 사대부, 유학자들을 통하여 이미 동아시아의 세계종교로 인간들에게 보편화되었습니다. 하느님(天)께서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모두 부여하셨는데, 악에 너무 치우치면 악귀.악령이 되어 유교사회에서 배척됩니다. 하느님(天)께서 선택하신 성자이신 공자님을 통하여 인간세계에 베푸시려 한 하느님의 마음(기품)은, 공자님의 가르침만을 통하여 모든 만민이 인정하는 과정을 충분히 거쳤습니다. 하느님의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거나, 성자이신 공자님을 매개자로 하여 보편화시킨 유교교육에서 벗어나,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에 대항하는 Chimpanzee계열 부처 Monkey(인도 창조신 브라만에 항거, 브라만을 내리깔고 덤빔)類. 하느님보다 높다고 주장하다 원자탄 맞고 항복한 성씨없는 賤民.부처Monkey계열 일본 점쇠(일본천황)와 점쇠가 강점기에 한국에 만든 마당쇠 賤民.부처Monkey경성제대(해방이후 서울대로 이어짐)와 그 추종자들의 대중언론 도전은 심각하지만, 이미 패전국이 되어 법적 자격은 없으며 패전국 奴隸.賤民이자 침팬치계열 부처 Monkey類밖에 되지 않습니다. 順天者存, 逆天者亡.
10].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유교에서는 하느님(天)을 초월적 절대자로 보고 숭배해왔습니다. 공자님은 하늘이 내려보내신 성인. 성인임금(文宣王:공자님 이전의 요순우탕과 같은 성인임금이심)이시자, 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이 점이 중요합니다. 공자님의 가장 큰 업적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은주시대에 믿어온 우주만물의 지배자이시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의 초월적 존재를 많은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계승시키시고 가르치신 점입니다.孔子聖蹟圖에 보면 균천강성(鈞天降聖)의 그림이 있습니다. 공자가 탄생할 때 모친인 안징재(安徵在)의 방에서 균천의 풍류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하늘이 성자가 탄생함에 감동하여 화락한 음악으로서 위로하였다는 이야기를 도해한 것입니다. 균천(鈞天)이란 하늘의 중앙인데, 최고신이신 하느님(天)이 직접 내려보내신 성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天)의 하위신이신 오제(五帝:조상신 위치에서 승천하시어 계절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하위신이 되신 또다른 하느님의 모습)께서 내려보내신 후손개념이라기 보다는 왕조가 바뀌어도 영원토록 인류에게 숭배되어야 할 성자의 탄생에 감동하신 균천(鈞天)께서 음악으로 위로하신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세에서 공자님의 형편이 가난했다느니, 가난해서 천한일도 하셨다느니, 나이많은 아버지와 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논란의 대상이 된다느니 하는 속물적인 시비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이 모든것을 초월하실 수 있는 최고 하느님(鈞天:五帝의 여러 하느님중에서도 중앙에 계시고 존경받으시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셨기 때문에, 후대의 황제.제후.사대부.만백성이 숭배하고 존경하는 성인이시자 스승으로 추존되신 것입니다. 균천(鈞天)이란 하늘의 중앙인데,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신과는 다르게, 오제(五帝)중 가운데에 위치하시는 황제(黃帝)로, 오제중의 으뜸 하느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황제(黃帝)는 성인(聖人 , 聖天子)으로 사시다가, 승천하셔서, 계절을 다스리시는 오제(五帝)하느님중 한분으로, 오제(五帝)하느님중 가장 중요한 하느님이십니다. 은나라 왕족 후손이신, 공자님의 조상이십니다.
공자님은 원래부터 왕이 아니시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성자로 탄생하시고, 하느님(天)의 기품을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가르치시며 인의예지신, 삼강오륜의 덕목을 있게 하신 성인으로 사시다가 사후에 성인임금.성인스승(大成至聖文宣王.至聖先師)의 공식 칭호를 추존받으신 분이십니다. 공자님은 하느님(鈞天)에게 덕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은나라왕족의 후손이시나 가난하여, 낮은 직책에서 시작하여, 만인의 스승이 되는 과정을 겪으신 위대한 성인이시자 스승 공자님. 제왕과 만백성의 스승 공자님!
11]. 유교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하늘의 기품과 땅의 형상을 가장 고귀하게 부여받은 중간적 존재.
하느님(天)을 최고신으로 하여, 상고시대숭배 五帝(하늘로승천,계절주관)를 하위신으로 모시며, 오제이전 초월적 자연天(태극과연계)이 함께 어우러져 형이상학적 天숭배하던 공자 이전의 始原유교. 요순우탕등 성인임금도숭배. 불교는 나약한 부처Monkey가 창조신보다높다며 인도창조신 브라만 내리깔고 항거.
고조선의 기자조선은 은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지배층이 공자님이전의 始原유교문화에서 사용하던 한문성씨를 사용. 이후 기자조선 지배층은 삼한등의 지배층으로 이어짐. 삼한은 은나라 왕족 기자조선의 후손 기준왕[위만에 멸망당하여 피신중 서씨를 사용.이후 삼한의 한씨사용도 있게 한 시조. 그 당시는 중국 상고시대의 영향으로 지명등을 따서 성씨를 만들어내는 시대였습니다]의 후손들이 건국한 나라입니다. 한나라때 공자님의 유가사상이 국교로 채택되어 이후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의 세계종교로 성립하기 이전에는 고대 한국의 삼한이, 은.주시대의 始原유교를 이어받은 기자조선 기준왕의 후손답게 始原유교의 제천의식인 상달제.시월제, 단오절을 거행하였습니다. 삼한의 영토에서 가야나 백제.신라등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 나라들도 역시 고대 유교국가들입니다.
한국 세계사 교과서나 역사 교과서로 볼 때, 한국은 한나라 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서 세계종교로 성립된 유교국가로 이어짐.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계승하여 유교교육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고려.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가 옳음.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공자님이후 한나라때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는 하느님(天),五帝(조상신에서 승천,하느님의 하위신이 되심),지신,산천신,오사(五祀, 조상신계열).공자숭배.부엌신(火관련)도 제사하는 다신교.불교는 Chimpanzee,부처(인도창조신 브라만에항거 후발Monkey부처가 창조신내리깔고덤빔)계열로,성씨없는賤民점쇠(점쇠가 한국에 마당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를 천황옹립,하느님보다높다하다 원자탄패전.일본 항복후, 미군정때 조선성명복구령,전국민이 조선 유교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해야 하는 행정법.관습법 유교한국. 5,000만이 유교도임.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불교,기독교는 한국영토에 주권없음.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가 옳음.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12]. 공자님(하느님이 내려보내신 선택받은 성인)이나 예수님(하느님의 독생자로 태어나심)이나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아야지, 세속의 기준으로 여러가지 루머로 판단하면 않됩니다.
유교는 수천년에 걸쳐 제천의식(天에 대한 제사), 지신제사, 산천신 제사를 행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흘러 여자분들이 수천년동안 부엌신(火)에게 간단한 제사를 지내온것을 보면 부엌신도 신의 위치에서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의 반열은 아니지만 문중별.가족별로 조상제사도 행하고 있습니다. 오제(五帝)처럼 조상신계열에서 하늘로 승천하시어 계절을 다스리시는 하늘天의 일부가 되신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조상신이 되기는 어렵고 몇천년이 지나도 제사하는 시조정도로 머물것입니다. 또한 대부분 가문의 조상제사에서도 고조부모.증조부모.조부모.부모만 제사지내기 때문에 단지 조상제사로 그치며, 조상신이나 시조신은 될 수 없습니다. 유교는 하느님(天)을 최고신으로 하여 오제,지신.산천신,부엌신(火관련)등 하위신을 모시는 다신교전통입니다. 몇천년이 지나도 제사받으시는 공자님. 유교는 혼이 하늘로 승천하는데, 하느님이 내려보내신 성자이시기 때문에 그 혼은, 하느님(제천의식의 대상)곁에 머물러야 되고 천인(天人)합일로 따지면 영원불멸의 신적 존재로 제사받는 성스러운 先聖이십니다.
그 모든 세속적 재단에도 불구하고 공자님.예수님 이 두 성인을 대체할만한 하느님의 선택은 인류역사상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을, 하늘의 계시로 태어나신 점도 중요합니다. 필자는 가톨릭을 잘 모릅니다.
[5]. 일제강점기를 거쳐, 혼란했던 대학, 중.고등학교 문제는, 법적 기준과 주권.자격 기준으로, 중.고교의 경우, 어느정도 대학진학률등이 높아왔던 학교들이, 倭잔재학교보다 우선순위를 가져야 합니다. 자체의 군사력으로, 독립하지 못해서, 왜구 잔재학교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시중의 대중언론.사설입시지의 왜곡을 겪으면서, 갈등을 빚어왔습니다. 권력이 아주 강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어떻게 할 수가 앖어, 중학교 무시험전형, 대도시 고교 평준화로 부분적 봉합을 시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법과, 역사,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필자는 성대출신입니다. 국가주권처럼 성균관(성균관대)의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학벌도 아주 중요합니다. 성균관의 승계 대학 성균관대와,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복잡한 국제법상의 갈등이 얽혀있습니다. 해방당시 다른 대학들은 이 법적 갈등의 당사자대학들이 아닙니다. 유교의 하느님숭배,조상숭배와 舊신분제 전통을 잘 이해하던 예수회의 귀족계파 서강대는,대한민국 정부 출범이후 국사 성균관교육이 지속되면서, 양반 성대를 이해하던 대학임.이뒤로 조선성명 복구된 5,000만 한국인 뒤 주권.학벌없이 성씨없는 일본 불교 Monkey 점쇠(요시히토,히로히토등)가 세운 마당쇠.개똥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와 그 미만대학들.@대중언론,사설 입시지, 후발 법령은, 국제법, 한국사(국사 성균관교육. 성균관대 자격), 세계사, 국가주권의 상위법.상위 국제관습법 못이깁니다.
@@2차대전-->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을사조약.한일병합등 불평등조약 무효, 대일선전포고)-->그 이후 카이로선언. 카이로선언이후, 프랑스.구소련.폴란드가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연합국 국가원수들의 합의문이며, 미군정법률보다 상위법인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의 상위법으로 자격있는 국사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교육기능 승계이전)-->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한국에 주권이 없다고 항복한 일본. 성씨없는 일본 점쇠(일본에서는 천황)가 세운 경성제대 및 여타 초급대, 중.고등학교들 @그런데, 상위법인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에 의해,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한국영토에서 축출해야 될 패전국 일제잔재 경성제대를 서울대로 개칭하고, 공자묘경학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는 하위법률이 제정됨 (성균관은 일제 강점기에 교육기능 폐지되어, 미군정기에 복구함). 미군정당시의 문교부 공무원 및 자문그룹들이, 하위법인 미군정법률을 제정하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로 상위법자격 성균관(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에서 자격있는 성균관)을 약탈하려는 시도를 꾀한것임.*미군정 군정법령 제 15호.1945년 10월 16일 @이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전국 유림대회(고문:이승만, 김구, 위원장:김창숙)를 개최하여, 성균관대를 설립하기로 결의함. "1945년 12월 10일 자유신문 보도기사(成均館大學 재단을 촉성, 1,000여 대표 참가로 全國儒林大會)가 국사편찬위 자료에 있음.@.미군정기의 국사 성균관교육. *학제. 성균관 태학.이상은 유학에 관한 학교이나 또 중앙과 지방에 외국어학과 의학, 율학, 천문지리학 등을 가르치는 각 기관이 있음.* 필자주::성균관(태학)만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구이고, 개화기의 기타 교육기구는 중등교육기구들입니다. @법령 제102호.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1946년 8월 22일@그리고 김창숙 성균관장이 전국 유림대회 결의대로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등록하고 대학으로 인가받음.성균관 후신 경학원에서 강의하던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장이 되고, 1946년 9월 25일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습니다.이 때부터, 성균관대는 대학기구로, 성균관은 공자님 제사기구인 성균관으로 공식 2원화된것임. 성균관대가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내용은 성균관대와 성균관의 입장이 동일합니다.@조선성명복구령.[시행 1946. 10. 23.] [군정법률 제122호, 1946. 10. 23., 제정] @미군정령 제 194호 6조(1948년)는,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유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제6조 향교 재단의 재산으로부터 생하는 수입은 좌의 목적 이외에는 사용함을 부득함.1. 성균관 급 성균관 대학의 유지. *향교재산관리에관한건[군정법령 제194호, 1948.5.17., 제정]
https://blog.naver.com/macmaca/223528462438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대나 한국 유교전통의 해방후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 현재에도 이어지는 행태등(수천년 유교문화 전통이라, 국가나 집권정부 차원에서 제재하지 않는한 끊임없이 이어지는게 전통문화들임)에 대해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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